세부에서 오래 살고보니 지난 24년간 세부를 바꾼 특징적인 것들이 있다면 SM, Ayala, Shangrila등이 생긴 일 그리고 막탄 New Bridge, IT Park 또 SRP 등의 건설이 큰 변화를 준 듯합니다. 가장 최근엔 SM Seaside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처음 필리핀에 도착한 곳은 Manila입니다. 그때 마닐라 마카티의 상징은 Landmark 백화점이었습니다. 최근 마닐라에 가보니 랜드마크 백화점은 존재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그옆 Green Belt와 Glorieta 또 Pasay의 SM Mall of Asia에 완전히 가려져있습니다. 한국에 삼성이 있다면 필리핀에는 SM이 있습니다. SM 그룹 창업자인 헨리 시 회장은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대표하는 부자로 유명합니다. 포브스의 '2016년 전 세계 부호(Global Rich) 순위'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약 14조원(세계 71위)으로 아세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부호입니다. 쇼핑몰 백화점 등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통체인을 운영하고 있는데 유통 분야에서만 직원이 4만 명에 이르면 연간 20억 달러 상당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현재 SM 백화점은 전세계적으로 58개가 있고 세계 10대 대형백화점에 4개가 포함되고 100대에는 18개의 백화점이 순위에 들어있습니다. 사실 SM은 필리핀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서 모든 국민이 쇼핑과 외식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등을 한자리에서 하게끔 만들었고 삶의 중심을 백화점이 되게끔 만든 기업입니다.
Henry Sy 스토리
施至成(Sy Chi Sieng, 91)씨는 1924년 중국 Fujian성 Jinjiang시 Ankhue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12살 되던 1936년 그의 아버지는 큰 꿈을 품고 필리핀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처음 시작한 일은 Sari-Sari(구멍가게)였습니다. Echagu St.에 위치해있고 오늘은 CalosPalanca Sr. St. 마닐라 뀌아포입니다. 거기서 식료자재와 잡동사니를 팔았고 운영이 잘되어 2개 점포까지 확장했었습니다. 한때 Manuel Quezon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Quiapo에 있는 Quezon Bridge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게에서 팔던 모자를 쓰기도 했었고 그 이후 Sy씨는 모든 대통령들을 사업으로 인해 만나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 구멍가게에서 매일 12시간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일이 바쁜 까닭에 그는 한번도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아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일을 하던 중 Sy는 영어의 한께를 느껴 공부하고자 아버지에게 학교를 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Auiapo Anglo Chinese School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영어를 못해서 1학년에 들어갔는데 당시 학생중 나이가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4학년이 되서야 담임선생님은 그를 인정해주어 졸업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때 그는 가난했기에 늘 누가 쓰던 책으로 공부했고 노트도 제대로 갖추질 못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시 저는 가난했고 땀 흘리며 일하는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부에서 1등을 못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업에서는 그룹의 리더가 되었습니다"라고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해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1946년 아버지의 가게는 완전히 불타버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순간에 전재산을 잃고 너무나 상심이 컸기에 필리핀에서의 모든 것을 접고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Sy씨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아버지는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도 함께 가겠냐고. 그러나 오히려 그때 저는 이제 사업을 시작해야 할 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고 아버지에게 저는 여기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시련 앞에 너무나도 괴로워했지만 그러나 나는 결코 희망을 잃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949년 China Bank에서 자금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무역을 하던 미국인으로부터 신발을 구입해 신발가게를 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물건을 팔다 남아있던 불발탄이 터지며 폭탄파편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친구가 즉시 그를 병원에 데려다 주어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의 도움이 고마워 그와 사업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1950년 되면서 사업의 한계를 느껴 Fat Eastern University에 입학을 해서 Commercial Studies를 공부했지만 2년만에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때 이름을 Sy Chi Sieng에서 Henry Sy로 바꾸고 필리핀 시민권을 획득했습니다. 그가 처음 구두가게 사업을 하면서 잘되어 나가면서 이름들이 "Plaza", "Paris", "Park Avenue" 등등 대부분 P자로 시작되는 이름을 쓰다가 나중에 Shoe Mart(SM)라는 이르믕로 바꾸며 필리핀 최초로 에어컨을 설치한 구두가게를 열었고 사업이 번창하면서 그는 사업의 세계를 몸으로 익히고 배워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업자와 생산자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또한 소비자들 그리고 종업원을 알게 되면서 이런 기반이 오늘의 백화점을 운영할 수 있게 된 힘이라고 합니다. 그때 구두가게 첫 Shoe Mart는 1958년 백화점과 영화관이 몰려있던 Rizal Ave.에 개업했고 점차 Cariedo, Makati, Tabora, Cebu, Cubao등 5군데의 지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드디어 1972년 처음으로 Echague에 SM백화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2달 후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사업을 점점 더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3년 처음으로 대형백화점을 건설하는 도중 은행에서 지불 정지가 되는 부채가 눈더미처럼 불어나는 상황에서 높은 인프레이션이 찾아와 위기가 닥쳤었습니다. 또한 경제는 니노이 아퀴노 저격사건으로 완전히 침체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모든 은행들은 SM은 결국 파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런 어려움들을 당당히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겨내고 결국 1985년 케손시 EDS와 North Ave가 만나는 지점에 16헥타에 이르는 SM City라는 대형몰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어려웠습니다. 백화점과 슈퍼 그리고 몇몇의 점포만 들어오고 다른 상인들이 입주를 꺼려했습니다. 또한 마카티 신발가게 종업원들이 데모를 일이켰습니다. 이때가 거의 최고의 절망과 위기의 순간들이었습니다.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SM 백화점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무척 불안한 필리핀 상황에 이런 엄청난 대형몰을 세워놓았고 입주를 꺼려하는 분위기를 반영한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Henry Sy는 달랐습니다. 그의 백화점 철학은 "지어 놓으면 반드시 오게 되어있다"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당시 '분위기와 상황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고집과 신념을 지킨 그의 경영철학이 오늘날의 SM의 정신이 아닌가'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결국 그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SM Centerpoint, SM Mega mall, 1993년에 세워진 SM City Cebu, SM Southmall, SM Bacoor와 SM Fairview등 대형 몰을 계속해서 지어나갔습니다. 정말 엄청난 필리핀의 몰 혁명이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그야말로 필리핀은 SM의 철학이 실현된 또한 SM문화를 이루어 나가는 SM공화국이 된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Henry Sy의 사업에 대한 유명한 어록을 소개합니다.
"하루아침에 성공을 하거나 쉽게 돈버는 방법은 없습니다. 혹 사업에 실패를 했거든 좌절하지 마시고 또 도전해 보십시요. 또 사업이 잘된다고 해서 쉽게 마음을 바꾸지 마십시요. 성공은 단지 행운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성실히 일해야 하며, 좋은 신용을 쌓아야 하며, 기회가 와야 하며, 시장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하고, 시기도 좋아야 합니다"
현재 SM은 유통, 레저, 금융 모든 분야로 뻗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세부의 한인 중에도 헨리 Sy를 넘어서는 경제인이 나오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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