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서 오래 살고보니 어느덧 조금씩 현지화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 그렇게 거부감이 있었고 어색하기만 하던 이 나라의 문화들도 이제는 그다지 멀어지기만 하지 않고 조금씩 친숙해져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마닐라는 교민의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기에 그곳 교민들의 발자취를 보면 곧 세부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듯하여 가끔씩 마닐라에 사시는 선배님들의 근황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결국 고보다도 오래 사신 중국계 분들의 역사를 보면 곧 우리 한인들의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귀한 좌표가 된다고도 생각됩니다. 일단 필리핀과 한국의 교류에 있어서 크게 문제화되고 있는 부분은 코피노(Kopino) 문제입니다. 오늘 구글에 코피노라는 단어를 쳐보면 68만개의 검색사이트가 나오고 유투브를 통해 검색해보면 7천여 개의 동영상이 검색됩니다. 짧은 시간 내에 참 어마어마한 글들과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국회도서관에서는 관련 논문이 10편이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이제는 한국도 이곳 필리핀과는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되어가며 필리핀 역사의 한 Chapter로 기록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코피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세부의 코피노
세부에서 코피노라는 단어와 존재를 발견한 것은 아마도 8년 전으로 기억됩니다. 예전 세부코피노 어린이 재단이 유지현 대표의 지인이었던 다이버 박강성 씨가 수중에서 사고를 당하면서 남아있던 필리핀 가족을 돕게 되면서 박씨의 필리핀 아들 '바울(켄트)'이를 지인들이 함께 돕게 되면서 세부에는 코피노라는 호칭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코피노를 돕는 일들이 시작외었습니다. 그후 CKN 신문사를 창립했던 전상호 씨의 '소파코파' 그리고 종교단체에서는 나원길 선교사가 코피노 사역을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언론들이 코피노의 현황과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세부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MBC PD수첩, 시사매거진, 휴먼다큐, KBS와 또한 수많은 신문사와 잡지에서 세부를 방문했었고 정치적으로는 정하균 전의원과 김영삼 전대통령도 코피노 어린이재단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수많은 코피노를 돕는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세부에도 생겨났고 어느 때는 심한 과열로 단체들 간의 알력도 생겨나기도 했었으나 현재로는 예전 같은 열정과 활동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 합니다.
특히 MBC PC수첮의 '코피노 비즈니스'가 방영된 이후에는 코피노 단체에 대한 교민들의 부정적인 여론이 많이 형성되어 피디수첩에서 언급한 단체의 활동이 약화되면서 세부에서도 이제 코피노 단체들의 과쟁 과열은 식어져 있는 듯 합니다.
저는 제6대 한인회 시절 부회장으로 봉사를 했었는데 당시 한인회에 공식적으로 한국의 세계 재난 구호회라는 단체가 코피노를 돕는 일을 하고자 해서 코피노를 소개해주고 또한 자신들의 후원사업을 도와달라고 요청이 한인회 측으로 자주 들어왔습니다. 이 일을 제가 전담하게 되면서 저도 처음으로 코피노라는 세계에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면서 많은 경험과 그 분야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가 2011년이었습니다. 지원이 필요한 '코피노'인 아이들을 찾으러 이곳 저곳을 헤매며 찾아 다녔지만 각 바랑가이와 현지인들 세계에서는 코피노가 뭔지도 모르고 주변에 한국계 아이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또 결정적으로 코피노 자녀를 기르는 싱글맘은 대체적으로 술집과 바, 나이트클럽에서 삶이 이루어지는 까닭에 선교사 신분인 저로써는 그런 세계를 전혀 알지를 못하고 세부에 오래 살았어도 그런 곳이 어디있는지도 생경한 탓에 코피노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찌어찌 해서 소개를 받은 사람이 자이로(Jairo)라는 당시 1살 된 한국계 어린아이와 엄마 자넷이었습니다. 당시로써는 그쪽 세계를 전혀 몰랐기에 부정적인 시각이 가득해서 사람의 품위가 없는 이들로 지레 짐작하고 찾아갔는데 실제 만나보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고 원인이 가난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자넷 자매는 한인업소 술집에서 일했지만 거기에서 만난 나OO라는 한국학생과는 근 6개월이나 지속적으로 만났고 함께 마닐라로 갔었고 이집 부모님들에게도 인사하러 왔었고 무척 가깝게 지냈기에 함께 찍은 사진도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한국학생은 임신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갔고 자넷은 그때부터 아기를 출산한 이후 힘든 인생의 여정이 시작외었습니다. 그때부터 지난 6년간 자넷 모자에게는 월 3만씩의 후원금이 지속적으로 지급되고 있습니다.
자이로의 장래꿈은 선원입니다. 자이로를 후원하는 한국의 후원자는 자이로와 엄마를 한국에 한번 초대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언론에 많이 소개가 된 까반딴 마을의 아이들은 참 어려운 과정을 거쳐 찾아낸 아이들입니다. 요한이네 그리고 멜로디 가정 등 7가정이 바로 아얄라 백화점 옆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전에 그 동네에 유명한 '펌프'라는 클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코피노 식구들은 많아졌고 저도 '세계재난구호회'에서 '메신저인터내셔널' 단체로 활동을 옮겨갈 때 무려 코피노 식구가 120명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코피노에 대한 지원이 있다는 것이 코피노 가정 주변에 소문이 나면서 코피노가 아닌 필리피노들도 마치 코피노인 척 무조건 원조부터 받자는 식으로 몰려와, 저혼자로서는 감당이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구호대상자로 코피노 등록한 아이들의 반 이상이 사실은 필리피노였다는 것을 저도 그리고 한국에서 제 코피노 활동에 협력하시던 분들이 알게되면서, 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 것도 당연했습니다. 결국에는 제가 물러나는 것으로 코피노 활동은 접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는 세부대학교 강의사역으로 활동의 영역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한데 재미있는 사실은 제가 가르치고 있는 세부대학교(UC)에도 코피노 부모가 더군다나 제 강의실에 여럿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코피노는 참 질긴 인연으로 이어진다고 생각됩니다. 세부사회의 가장 낮은 영역의 빈민가 세계에 있던 코피노 가정들에게서 떨어져, 그래도 엘리트며 중산층 세계의 학생들 세계로 무대를 옮겼는데도 거기에도 코피노 가정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곳 학생들은 극심히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한국학생들을 만난 경우는 아니고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학생들과 사귀다 임신이 되는 등의 이유로 한국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경우입니다. 또 대부분 인문들이 좋고 똑똑하기에 스스로 현재의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학교에 있으면서 알게된 우려스러운 현상은 현지 학생들이 대체적으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무척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강의실에서 만난 한국교수인 저에게 가끔 이 학생들이 고백처럼 이야하는 내용은 "한국 사람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당신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길 참 잘했다'는 스스로의 위안을 갖곤 합니다.
코피내의 내일
한국과 필리핀의 접촉은 과거 임진왜란 시절로까지 올라갑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카이오(세례명)는 신앙 때문에 필리핀으로 추방되면서 3년간 필리핀 생활을 한 조선인이란 기록이 있습니다. 그후에는 김대건신부님이 1837년 방문한 기록도 있습니다.
이제 작년 한해 필리핀 방문 한국인수는 139만 명입니다. 또한 거주 교민수는 9만 명이라합니다. 이제 서서히 우리 한인들도 필리핀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중국계 SM이나 스페인계 AYALA처럼, 그들의 국적은 필리피노인 것처럼 한국계들도 이제 이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필리핀 사람들이 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코피노 아이들은 필리핀에서 우리와 함께 필리핀 사람으로 스스로 자리를 잡고 일어서야 하고 우리들은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고 지원하며, 함께 필리핀의 자랑스런 한국계 사람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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