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서 살고보니] 이멜다 - 시대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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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에서 오래 살고보니 가끔 필리핀 여인들의 두 가지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 부지런하고 겸손하며 따뜻한 전통적인 여인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다른 면은 무척 자존심이 강하고 사치가 심하며 허영이 가득하고 또한 서구적인 이지적인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겸손하기도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강인하며 자기애가 무척 강한 모습에 간혹 당혹스러운 경우를 느끼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내면의 세계가 이루어지는데는 역사적으로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 통치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필리핀의 여성 하면, 세계적으로 그 중심축에는 이멜다 여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오늘 필리핀 여인들에게는 무의식적인 이멜다 키즈들이며 이멜다가 누렸던 권력과 미모의 힘 그리고 사치가 그대로 유산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가를 생각해봅니다. 그러하기에 이멜다의 본질을 알아볼 수 있다면 오늘의 필리피나스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멜다의 성장배경

그녀의 어린시절은 가난했습니다. 1929년 7월 2일 그녀는 마닐라에서 Vincente Romualdez와 아내 Remedios Romualdez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두 번째 결혼을 해서 얻은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 빈센트에게는 첫 아내가 죽으면서 남긴 이미 5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과 다시 6명의 자녀를 새로 얻었습니다.

아버지 빈센트의 인생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거기에 잦은 가정불화로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 벤자민과 함께 셋은 산미구엘에 있는 집에서 나와 주차장을 개조한 방안 긴 판자 위에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죽던 1938년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며 이때의 이멜다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멜다는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항상 바쁜 어머니의 관심 밖에 밀려나 외톨이로 혼자 보낸 시간이 많았고 그런 어린시절이 그녀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제대로 되는 것들이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경제적으로 너무나도 어려웠던 그는 마닐라집을 팔고 레이테 타클로반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그녀는 배다른 형제 5명을 포함한 10명의 형제 자매들과 10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해 나아가면서 '타클로반의 장미'로 소문이 났었습니다.
그녀의 제일 큰아버지인 Norberto는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Norberto Jr.였습니다. 그가 결국 노동부 장관을 지내게 됩니다. 둘째 큰 아버지인 Miguel의 첫째 아들은 미국주재 필리핀 대사를 지냈던 Eduardo이고 둘째는 하원의장을 지낸 Daniel이었습니다.

이멜다가 살아난 것은 그녀의 성공한 사촌 덕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성공한 사촌의 마닐라 집으로 20세에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마닐라에서의 첫 번째 직장은 마닐라 번화가에 있는 Escotta의 악기점에서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그후 중앙은행의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1953년 미스필리핀대회에 참석하여 'Muse of Manila'를 받았습니다.


마르코스와 만남

1954년 두 사람은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멜다에게 마르코스는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멜다는 마르코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키도 작았고 나이도 12살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코스는 이멜다에게 매일 매일 다이아 반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멜다는 11일 동안 무려 11개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는데도 끄떡 하지 않았을 정도로 자존심과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마르코스는 이런 프로포즈로 이멜다와 결혼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멜다, 언젠가 대통령의 부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만난 지 11일만인 5월 1일 마닐라의 산미겔지구에 있는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Ramon Magsaysay가 참석해 이들을 축복했다고 합니다.


이멜다의 사치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질 무렵 말라카낭궁을 방문한 영국의 사진기자 알렉스 보위는 궁지하에 있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옷장 속에 쌓여있는 세계 최고급 유명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의상과 구두, 핸드백, 그리고 장신구들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986년 하와이로 망명 당시에 발견된 이멜다의 사치품 목록으로는 최고급 브랜드의 구두 3,000켤레에 심지어 금이나 은으로 장식된 구두는 기본이고, 수백 벌에 달하는 최고급 의상, 또 길이가 2m가 넘는 대형거울 옆에는 프랑스 루이비통 손가방이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최고가의 파티용 장갑 68켤레, 각종 유명브랜드의 팬티 3,500장, 최고급 이브닝가운 2,000벌, 최고급 검은색 브래지어 500개, 최고급 가발 30개, 아직 뜯지도 않은 스타킹박스 200개, 최고급을 자랑하는 수백 개의 보석 액세서리, 그중 하나는 1만 9천 달러의 가격표가 붙은 보석도 발견되었습니다.

방 한쪽에는 최고급 신상 명품 가방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쌓여있었습니다.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 청구서들을 조사한 결과 오전에 100만 달러, 오후에는 200만달러 어치의 골동품을 사들였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청구서에 의하면 이멜다는 10만 7천달러의 이브닝 가운 구입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 발렌티노에게는 실크 드레스 6벌을 한꺼번에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옷장에는 세계 각국의 드레스와 갖가지 색상의 의상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있는 구찌 핸드백들이 선반 위에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이멜다가 살았던 궁의 내부는 말라카낭궁의 최고급 인테리어로 마감된 공간으로 꼽힙니다. 말라카낭궁의 바닥은 이탈리아산 대리석이며, 천장은 수정 샹들리에로 장식되었고, 욕실에는 황금으로 된 세면대가 있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도금이 아니라 순수하게 100% 황금으로된 세면대라는 점입니다. 마르코스 부부가 해외를 방문할 때는 전용비행기 2대를 사용했는데, 1대는 자신들과 측근들을 태우기 위한 비행기였고, 나머지 1대는 자신의 드레스와 여행용가방 200~300개를 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멜다는 최근 자신에 대한 공격에 대해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내가 영부인이 됐을 때 필리핀은 정말 가난했답니다. 10개 가문이 모든 땅과 재산을 소유해 개발도, 정부 사업도 힘들었어요. 잘 사는 가문은 개인 헬리콥터가 있으니 시골에 고속도로를 건설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요. 마르코스 대통령은 땅이 없으면 (간척해서) 땅을 만들면 된다면서 간척지에 교육, 의료, 문화시설을 지었어요. 우리 부부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하지만 21년간의 마르코스 시절이야말로 필리핀의 영광의 시기였고 많은 국민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 여인은 평생을 자신의 기준, 자신의 아집 안에서 살아가는 가 봅니다.

최근에 조국은 최순실 사건으로 시끌합니다.

그러고 보면 여인들도 정치적 권력을 갖게 되면 권력과 사치에 무척 애착이 강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부에서는 교민 중에 이런 권력과 사치에 집착이 강한 여인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 갖고 싶다는 권력욕과 물욕은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잘 조절한다면 자기발전의 원동력과 자기 계발의 기틀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공동체를 위한 욕구와 고민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욱 현명하고 시대공헌적인 리더로 성장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23년 전 세부에 정착하여 현재 한사랑 교회 목사, 코헨대학교 세부분교 학장에 재임중이며 UC대학 HRM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