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교회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잉크젯 프린터가 하나 있습니다. 몇 달 전부터 계속 말쏭을 피우더니 며칠전에는 더 이상 인쇄가 안 되는 겁니다. 주일예배를 위해 프린터를 쓸 일이 유독 많았던 토요일 오전 급하게 프린터 하나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런데 매뉴얼을 보니깐, 이 프린터에는 특별한 기능이 하나 있었습니다. 'Wireless Printing(무선 인쇄기능)'이라, 제 노트북과 프린터를 굳이 USB 포트로 연결하지 않아도 인쇄가 가능한 겁니다. 스마트 폰에서 문서와 사진을 Wireless로 보내도 역시 바로 인쇄가 되는 겁니다. 이 기능을 사용하니깐 요 며칠 인쇄할 일이 있을 때마다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그 매뉴얼을 꼼꼼히 보지 않았다면, 저는 평상시 쓰던 것처럼 인쇄할 일이 있을 때마다, USB 연결선을 끌어다 제 노트북 포트에 꽂는 일을 1년이고, 3년이고 그 프린터를 쓸 때는 항상 반복했을 겁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인생의 매뉴얼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내 인생의 메뉴얼에 '너에게는 이러이러한 기능이 있으니깐, 너는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직업을 갖고 살면 행복할거야' 이렇게 나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심리학자 하유진교수가 쓴 「나를 모르는 나에게 / 책세상, 2017」라는 책 속에 있는 흥미로운 내용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선생님은 연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까지 하고 바로 그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는데, 이 분이 심리학 교양강좌에서 꼭 하는 관찰토론수업이 하나 있습니다.
학생들 앞에 선 선생님은 종이컵 하나를 꺼내면서 학생들에게 실험과제를 하나 내 주는 겁니다. "4인1조로 나눠서 각 조별로 앞으로 10분 동안 이 종이컵 하나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적어보자" 조별로 모인 대학생들은 그 동안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종이컵 하나를 두고 각 조별로 진지하고도 열띤 토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조는 친구들의 의견에 박장대소하기도 하고, 어떤 조는 종이컵 하나를 두고 정말 진지하게 토론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담배를 피는 남학생들의 입에서는 '재떨이로 써도 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여학생들 입ㅇ서는 '꽃씨를 심는 모종 화분으로 써도 된다'고 하기도 하고, 급할 때는 '메모지'로 사용해도 되고, 남학생들이 자판기 커피를 마신 후 그 종이컵으로 '재기차기'할 때 써도 된다하기도 하고, 건강검진시 '소변 받는 통'으로 써도 되고, '종이컵 전화놀이'할 때 써도 된다고 하는 등등 독특한 방법들이 나왔습니다.
조별 토론을 마친 후 각 조별로 발표하게 해서 종이컵 하나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모아 정리해보니 무려 70~80개의 쓰임새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수업과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도 종이컵 하나를 갖고 80가지나 할 수 있다는 것에 적잖게 놀라게 됩니다.
그 때 하유진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자세히 보고 있나요?", "여러분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가능성을 알아보려고 얼마나 노력하나요?"
하 교수의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알아줘야한다는 겁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종이컵 하나가 정말 다양한 용도와 쓰임새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을 보며 자신의 부족한 모습과 비교하며 부러워만 하고, 그런 상대적 평가와 비교 속에 자꾸 낙심만 하고 있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종이컵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들을 떠올려봐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직 제대로 관찰도 안했고, 그래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자신은 재능도 없고 무능력하며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을 지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유진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남과 비슷한 평범함도 있고 자신만의 특별함과 독특함도 있다. 나에게'도' 있는 게 있고, 나에게'만' 있는 것도 있다. 공들여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나를 들여다보고 알아내야 한다. 남들과 같아지려고 시간을 낭비하고 에너지를 쓰기보다, 나만의 가치와 특별함을 찾아 그것을 세상 밖으로 꺼내 크게 키워줘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성장기 때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탔습니다.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소년이었습니다. 공부고 운동이고 특별히 잘 하는 게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격이 좋아서 여기저기 친구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잘 어울리거나, 주도적인 성향도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아무 재능도 없었고, 특별한 능력도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대여섯 살에 고아가 되어버린 저는 그저 좋은 환경과 좋은 부모 밑에서 아무 걱정 없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마냥 부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에 처음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는 저에 대해서 잘 몰랐던 거 같습니다. 제게 무슨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지도 말랐습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하다 보니 이것저것 활동들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중창팀에서 노래 중간에 나레이션(해설)을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걸 해 본적이 없었던 겁니다. 누가 나레이션을 해야 할지 우리 모두 몰랐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씩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부끄럼쟁이였던 제게도 순서가 돌아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가 나레이션을 하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잘한다 칭찬을 하고 난리가 난겁니다. 저도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라 저도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 이후 그 교회에서 그와 같은 일이 있을 땐, 언제나 제가 그 역할을 맡아했습니다. 저도 제 안에 그런 재능과 가능성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목회를 하며 그 때의 경험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 외에도 교회생활을 통해 여러 가지 제 안에 있던 새로운 재능과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제 인생 사용설명서를 얻게 되는 그래서 제게는 너무 감사한 선택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종이컵 하나에도 80개의 쓰임새가 있다면, 그것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존귀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의 매뉴얼이 있겠습니까? 오늘부터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매일 매일 그 매뉴얼에서 새로운 당신을 찾아 멋진 인생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이야기 '샘'은 세부교민들께 깊은 숲 맑은 옹달샘의 시원하고 청량한 샘물 한모금 같은 글을 전해드리고픈 바람을 담은 김제환(광명교회 담임목사)님이 집필해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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