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 살고 보니 사람 사는 곳은 어느 곳이나 정치적인 지도자가 있습니다. 이곳도 한국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뜨거운 곳입니다. 한국은 얼마 전 제7회 지방 선거를 치렀고 서울시장으로는 박원순 현시장이 3선에 당선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부섬에도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적인 지도자간에 경쟁이 무척 심한 양상을 나타냅니다. 라푸라푸시나 만다위시는 오랫동안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시장을 하기에 외부의 경쟁 양상은 그렇게 심하질 않지만 세부시는 늘 정치적인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뛰어난 정치적인 엘리트 리더가 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경쟁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때론 그 경쟁이 시에 큰 발전과 역기능도 동시에 가져오는 듯 합니다. 세부시에만 인구가 근 100만 명이 넘으니 그렇게 작은 도시는 아닙니다. 물론 여기에 만다위시와 라푸라푸시까지 합한다면 벌써 300만이 넘는 거대도시가 됩니다. 우리 한인들은 세부시내에서 살아가려면 이 두 정치인의 정치적인 리더십의 방향에 의해 살아가는데 또한 사업을 하는데 큰 영향력을 받을수 밖에 없습니다. 주관적 견해입니다만, 사실 앞으로 세부섬의 미래는 앞으로 소개하려하는 이 두 사람의 리더십에 좌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두 사람을 살펴봅시다.
토마스 오스메냐
토마스 오스메냐(Tomas Osmeña 1948년생 마닐라)는 일반적 애칭으로 “Tommy”라고 부릅니다. 정치적으로는 푼독 카우스와간 리베랄 파티(Pundok Kauswagan Liberal Party)당 소속입니다. 그는 지역 국회의원을 한번 했고(2010-2013) 또 시장으로는 3선(88~95년, 01~10년 그리고 16~현재)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잘 아시는 대로 시에리오 오스메냐(Sergio Osmeña) 전 대통령의 손자입니다. 그의 아버지 시에리오 오스메냐(Sergio Osmeña)는 상원의원을 했습니다. 그의 형 시에리오 오스메냐 3세(Sergio Osmeña III)도 상원의원을 지냈고 그의 부인 마가리타 마고 림 베르가스(Margarita "Margot" Lim Vargas)도 오랫동안 시의회 의장을 한 정치인으로 한때 시장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테네오 시에비어 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그는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엔젤레스에있는 SEROS회사에서 Assistant Secretary로 일하다가 Foreign Credit Insurance Association에서 농경제 분석원으로 일했습니다. 그 다음 그는 Export-Import Bank of United States에서 임원으로 있었고 Apex Realty and Developers에서 오랫동안 부회장직을 맡았었습니다. 그때 LA 필리핀회 “Club Filipino"모임에서 부회장직을 맡았었습니다.
그가 1987년 세부로 돌아와 시장선거를 준비할 때 그는 어떤 당과 모임에서 아무런 도움없이 혼자의 힘으로 선거에 임했고 시장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Metro Cebu Development Project (MCDP).의 의장이 되어 세부시의 미래를 구상을 하며 외국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세부시를 발전을 시킬 프로젝트를 꿈꾸었습니다. 또 1990년에 그는 전국시장협의회에서 부회장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토미의 정치적인 리더십이 전국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입니다. 또한 가장 뛰어난 젊은 시장상도 동시에 받았습니다. 1992년에는 전국시장협의회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최대 업적은 SRP(South Road Properties)입니다. 깔본시장에서 딸리사이 사이에 있던 빈민가의 해변들을 개간을 해 새로운 도시를 만든 프로젝트인데 그것으로 그는 갈링 포옥 어워드스(Galing Pook Awards)상을 받았고 세부 역사 상 최고의 프로젝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토미는 2016년 당선되었을 때 발표된 공약은 상하수도 문제 개선, 교통체증, 균등발전, 불법약물척결을 내세웠는데 현재까지 대중교통의 활성화 프로젝트인 LRT(경전철)안은 정치적인 문제로 아직도 추진이 되고 있질 못합니다.
"자경단(The Vigilante Killings)". 토미의 최대 업적이 오랫동안 SRP였다면 반대로 최악의 업적은 반인권 시장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202명으로 조직된 자체경호 암살단을 조직했습니다. 이 자경단은 2004년부터 2006까지 168명을 암살했다고 필리핀 인권위원회는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무려 421명이 이 단체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추정됩니다. 2016년 5월 20일에는 자경단에게 살해 보상금으로 1인당 5만 페소를 지급했습니다. "당신을 마약 밀거래 협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체포전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것은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함인데 암살은 아무런 인권도 없이 즉결 처형되는 것이었습니다. 토미 시장의 최대과오는 인권을 파괴한 것입니다. 아빈 오르곤 국가인권위원회는 ‘길거리 죽음’의 증가를 우려했었습니다. 사실 두테르테 현 대통령은 대선 승리 직후 "마약상을 죽여도 좋다"며 경찰과 군에 최고 500만 페소(1억 원)의 포상금과 승진을 약속했었습니다. 세부도 범죄자에게는 만만한 도시는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토미는 시장이 된 후 자경단의 무법적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끓어오르자 자경단에게 상금 5만페소 주는 안을 철회하였습니다.
마이크 라마
토미 다음으로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전 세부시장인 라마입니다. 저는 이분이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한인회에서 일을 하느라 자주 뵌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이 시장으로 재직할 때 ‘세부시티 한국의 날’을 재정했고 제1회 한국의 날 때 직접 축사를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세부는 여러분들이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라마 전 시장은 생각보다 더 대인관계 폭이 넓고 유연한 정치인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Mike Rama는 1954년생입니다. 그는 세부태생으로 바삭 싼 리콜라스에 있는 Basak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졸업식때 졸업생 대표연설을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리더십이 뛰어났었습니다. 그리고 벨레즈 컬리지(Velez College)를 졸업해서 마닐라에 있는 산베다 컬리지(San Beda College)로 가서 법학을 전공하고 1983년에 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0~16년 세부시장에 2번 당선되어 시를 위해 봉사를 했었습니다. 마이크 집안도 정치가 집안입니다. 아버지 페르난도르 라마(Fernando Rama)는 시의원이었고 그 형제 중엔 국회의원 또 집안에 도지사, 상원의원도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사람이 저에게 중국인들의 처세술에 대해서 가르쳐준 것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외부인이기에 가능하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양쪽(여야)모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왜냐면 어느 한쪽에 기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가 재직하는 세부대학교의 어거스트 고 총장도 라마와 친하지만 또한 토미하고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토미는 상당히 권위적이고 공격적인데 비해 라마는 친근하고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반면 비전이 약합니다. 그러나 토미는 제시하는 미래가 분명하고 상당히 박식합니다. 현재는 이 두 지도자의 힘겨루기 속에서 세부는 성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세부에 거주하는 우리 한인들을 비롯한 세계인을 정책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더욱 능력있는 정치인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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