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 살고보니] 샹송과 멜랑꼬리

[세부에 살고보니] 샹송과 멜랑꼬리

세부에 살고 보니 현지인 중에는 우울증 환자를 거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뜨거운 날씨와 열정적인 열대문화의 영향인 듯 합니다. 그렇지만 열대문화라고 다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세부아노 종족들과 지내보면 이들은 늘 밝게 살아가다보니 삶의 고뇌 그리고 우울한 삶의 조건들 삶에 대한 진지함과 깊이가 때론 부족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서구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 중심에는 우울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때론 혼자 우울한 프랑스 샹송을 들으며 고독의 달콤함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부아노 종족의 문화의 핵심중 하나는 ‘Happy-Happy’입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북방민족들은 가끔은 인생을 고민해보며 멜랑꼬리(우울)에 빠져 에디트 삐아프, 아다모, 실비르바르땅의 옛 노래를 감상하는 시간들은 열대의 해피해피한 나날 속에서 드물게 상념에 빠질 수 있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멜랑꼬리’

정신분석가 프로이트가 말하는 상실을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애도와 멜랑콜리입니다. 여기서 “멜랑콜리”는 무슨 뜻일까요? ‘멜랑’은 ‘검다’는 뜻과 ‘꼴리’는 ‘딱딱한’이라는 뜻입니다. 즉 ‘멜랑꼴리’는 검은 담즙을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인체가 혈액, 담즙, 점액, 흑담즙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흑담즙이 과도하게 나오면 불명확한 이유로 슬프고 불행한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는 이것을 ‘멜랑꼴리’라고 했습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인문학 용어였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 창작의 원동력을 가져왔습니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이 멜랑콜리라는 단어가 천재들의 특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울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창의적인 상상력도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우울증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대중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독한 예외자로서의 입장을 관철한 두 거성, 덴마크의 키에르 케고르와 독일의 니체 또 지성과 신앙의 차이에 괴로워하는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도 주체성의 회복에 의해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는 실존적인 사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20세기 초엽에는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작가 카프카(1883-1924) 등이 일상적인 삶의 저변에 숨겨져 있는 음울한 허무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본래적 자기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자체 곧 실존을 본질보다 더 중시하는 철학인 실존주의도 서구사람들의 유일한 전유물이지만 대중문화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다가선 것은 프랑스 샹송곡이고 그중에 제일 대표적인 가수는 에디트 피아프인 듯 합니다. 그녀의 노래는 자신의 비극적인 삶의 반영이었고, 특기인 심금을 울리는 발라드는 애끓는 목소리로 가창되었습니다.

가끔은 이런 멜랑꼬리의 음악들은 이 이글거리는 열대의 열정과 광기를 누를 수 있는 깊고 차가운 내면의 진정제 같은 효용성이 있습니다. 이 열대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고뇌를 이유로 자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만큼 깊은 성찰이 부족할 수도 있겠습니다. 열대의 태양에 이끌려 내면보다는 앞에 보이는 일에 뜨겁고 강렬하게 살아가다가, 가끔은 이런 오래된 프랑스 실존주의의 샹송들을 들으면 들떠있던 삶의 리듬을 한 템포 느리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해주곤 합니다.

적당한 우울을 담은 음악에 몰입하는 잠시의 시간은 지금의 삶을 성찰하고, 쉽게 놓치고 지내던 인생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부의 한인 여러분, 오늘 우리의 기억 저편에 자리하고 있는 샹송이나 클래식 음악 한 곡을 호출해, 잠시 음악과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