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 살고 보니 시적인 감정은 많이 사라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에 가장 많이 남아있는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서시’를 다시 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세부 섬에 살고있는 우리 한인들의 심성 안에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이 섬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보려고 괴로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한인들 각자의 마음 안에는 사업의 별, 자녀의 별, 건강의 별을 바라보며 이국땅의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비바람에도 굽히지 않고’
고등학교 때 배운 일본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미야자와 겐지(1896-1933)의 시 ‘雨ニモマケズ’(비에도 굽히지 않고)와 윤동주의 서시를 비교해보면 놀랍게도 비슷한 살아온 시기와 내용도 비슷하며 마찬가지로 이 시는 오늘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국민의 시’입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않고 폐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학창시절에 윤동주의 시와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늘 외우면서 살아왔었는데 이제 이 열대 세부섬에 26년을 살다보니 이런 시들이 떠오르고 나는 이 섬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떤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지가 생각나 열대에서의 서시를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세부섬은 아직도 개발이 덜된 자연환경이 좋은 제 3세계이지만 최근의 모습은 도시화 비율이 높아져가며 점점 더 대도시의 모습을 향해 한 발자욱 더 앞당겨 가고 있기에 삶의 패턴이 열대에서의 소박한 섬생활은 멀어져가고 복잡해져 가고 있는 현실을 보니 순결한 윤동주의 서시와 겐지의 시가 생각이 나게 됩니다.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필리핀에서는 시기적으로는 좀 더 앞서 있지만 그래도 필리피노의 심장 안에 남아있는 시는 국민영웅 호세 리잘(1861- 1896)의 ‘마지막 작별 ( Mi Ultimo Adios )’입니다.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나의 어린 시절이나 젊은 혈기 넘치는 지금이나 나의 소망 오직 동방의 진주 너를 흠모하는 것 검고 눈물 걷힌 너의 눈 한 점 꾸밈도 부끄럼도 없는 티없이 맑고 부드러운 눈 동방의 진주 너를 바라보는 것이었노라”
부유한 중국계 아버지와 필리핀계 엘리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천재 리살은 필리핀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스페인 감옥에서 사형당하기 전 남긴 시입니다.
비록 이 무더운 열대섬에 살고 있지만 우리 한인들은 윤동주가 꿈꾸던 한 점 부끄럼 없는 삶과 겐지가 갈망하던 현미밥에 약간의 된장과 나물을 먹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고자 했던 그런 순수와 순결이 떠나지 않는 깨끗한 삶이 오늘 이 열대의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을 노래하는 하루를 소망해 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