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 살고보니] 향수

[세부에 살고보니] 향수

세부에 살고 보니 이곳이 이제는 편해졌습니다. 제가 도착했던 26년 전에는 세부의 모든 것이 낮설고 깨끗해 보이질 않는 환경 때문에 적응하기가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고 늘 조국 대한민국 소식이 너무 너무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당시 93년 상황은 인터넷도 안되었고 한국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비싼 국제전화와 편지 그리고 업무처리는 팩스였습니다. 당시 팩스는 고가였기에 현재 핸드폰과 같은 중요한 업무 품목이었습니다. 과거 우리 한인들에게 한국은 자부심이었고 한국에서 간혹 손님이 온다면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서 오시는 분이 주고 간 몇 개의 한국라면은 한동안 아주 귀한 선물로 이곳저곳 나누어졌고 또한 귀하게 보관하다 손님이라도 오면 대접할 수 있는 소중한 향수의 상품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세부에는 아직 직항이 없었고 공항 자체가 작은 시골역 같이 하루에 몇번 마닐라를 오가는 항공편만 있던 한산한 간이 공항이었습니다. 

원래 공항이 현재 IT Park 자리에 있었을 땐 경비행기가 날아다녔고 막탄으로 이사해서는 처음으로 여객기가 날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현재의 국제공항과 국내공항으로 나뉘게 되며 자랑스런(?) 지금의 공항이 되기까지는 3번에 걸친 변신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저도 모르게 나의 모든 삶의 영역과 문화 그리고 가치관은 현지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한국에 잠시 방문할 때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이제 모든 것이 세부를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비교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나의 고국이란 한국에 대한 향수도 점차 옅어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일반사병으로 군대생활에서 고향이 너무 사무치게 그리워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막상 말년 병장이 되어 사회로 되돌아갈 때 깨닫게 되는 ‘아 군대가 그립구나’며 마음을 바꾸어 직업 군인으로 전향하며 병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친구가 이해되는 느낌이 듭니다.

어린시절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밀었던 서울이라는 대도시 화려하고 복잡하고 유혹이 많은 그 도시를 따라 달려왔던 지난날…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세부라는 낮선 열대 낙후한 곳으로 옮겨졌을 때 하루 하루 향수의 젖어 울게 되고 그 화려한 서울에 대한 아쉬움이 가슴 한쪽에 남아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은 필리핀 환경에 적응이 되어가고 추운 서울은 너무나 춥게 느껴지고, 이제는 서울은 업무에 관련한 세미나, 회의, 모임이 잦은 도시 일뿐이 되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마닐라가 서울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그동안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었고 현대화되어 너무나 세련되고 멋진 국제도시가 되어 있었지만 그 반대로 그 옛날 촌스런 부족하고 덜 깨끗하고 세련미가 덜한 모습은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나를 닮은 덜 세련되고 계산에 더디던 서울이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점점 화려해져 가고 있지만 그에 따르는 피로도는 더 높아져가고 사람들의 생각의 영역도 예전처럼 둥글둥글한 사고의 영역은 도태되어가고 좌,우 그리고 상,하가 아주 분명한 여백이 없이 꼼꼼히 강렬한 색깔이 칠해진 채색도시로 서울이 여겨집니다.

세부에서의 26년 생활은 날로 발전과 성장을 거듭하는 내 고향 서울 한복판에 서 있는 오늘의 필자를 이렇게 어색하고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그날 서로 믿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맑은 하늘과 더불어 넓고 푸른 바다와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의 세부섬이 새삼 축복임을 다시금 느끼게도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