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씨의 소소한 일상]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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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마주보며 속삭이던 지난날의 얼굴들이 꽃잎처럼 펼쳐져 간다
소중했던 많은 날들은 빗물처럼 흘려보내고 밀려오는 그리움에 나는 이제 돌아다본다
가득찬 눈물 너머로 아~ 아~ 아~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거울을 보면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 오고가던 골목길의 추억들이 동그랗게 맴돌아 간다
가슴속에 하얀 꿈들을 어느 하루 잃어버리고 솟아나는 아쉬움에 나는 이제 돌아다본다
가득찬 눈물 너머로 아~ 아~ 아~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배인숙의 노래다.
나는 이 노래를 샹송가수 Alain Barriere의 1959년 곡 Un Poete로 먼저 들었다. 매력적인 저음의 알랑 베리에르의 목소리로 들었던 곡을 다시 배인숙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로 만났을 때의 신선함이란.

그해 나는 MP3 플레이어를 들고 인도를 여행했다. 그곳에서 만난 많은 인연들과 수없이 만나고 헤어진 뒤, 인도양을 접하고 있는 고아의 해변에 이르러, 킹피셔 한 병을 주문하여 놓고 이 노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반복해'들었다.
고아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해변 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유숙할 호텔로 가는 대신, 짐을 그대로 레스토랑에 맡기고 바닷가에서 저녁을 맞았다. 모두가 저녁을 먹을 시간, 나는 바다에서 홀로 수영을 했다. 아니, 누워 있었다.
인도양은 어머니의 양수처럼 따뜻했고 내 몸을 포근하게 받쳐 주었다. 그렇게 바다에 누워, 몇 시간 동안 머리 위로 떠 있는 커다란 보름달을 보며 지난 여정을 떠올렸다. 평화로웠다. 끝이 없을 것 같은 '평화', 원한다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 순간 이후, 나는 아주 조금 '느린' 사람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스물다섯의 끝이었다.

그즈음 어디를 가던, 메시지처럼 음악이 던져졌다. 그래서 보수적인 친정엄마에게서 독립을 강하게 원하던 때 어디를 가도 스팅의 "It's my life."가 흘러나왔다.
친정엄마의 주선으로 원치 않게 맞선이라는 것을 보고 난 뒤 마음 깊숙이 '독립'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작은 건설 회사를 운영 중이라는 그 남자는 강남의 40평대 아파트가 있고 그 집안에는 영화감상실이 따로 있다고 했다.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자신의 재산 목록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그 남자의 행동이 내겐 낯설었다. 일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낸다는 그 남자에게서는 독한 스킨 냄새가 났고, 일의 성격상 비싼 양주보다는 싼 양주를 좋아한다고 자신의 취향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오래 설명했다. 그 맞선 이후, 스팅의 'It's my life.'가 어디서나 흘러나왔고 얼마 뒤 나는 독립했다.
'It's my life.'는 그 뒤에도 찾아왔다. 아이를 낳고 5년째 운영하던 회사를 정리하던 때, 셋째 아이를 가졌을 때, 아이 셋과 세부로 와서 살게 되던 때. 그리고 그 모든일의 선택에서 'It's my life.'라는 한 마디가 조금 더 나의 결단을 확고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누구라도 그러하듯이'가 나에게 다시 찾아왔다. 지인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고아에서의 그날을 떠올렸다. 하루 동안 데워진 인도양에 누워 보름달을 보던 스물다섯의 어느 날. 그때 나는 어떤 감정들을 한번 해소하듯, 정리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왜, 지금, 이 노래일까?
세부에서 4년째를 맞고 있는 나는, 다음 달 한국에 다니러간다. 아이들과 방학을 보내러 한국에 가는 일은, 지난 4년간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콩세알 도서관을 열고 이렇게 긴 시간 부재를 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지금이 스물다섯 이후 다시 한번 책장을 넘길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책장이 바뀔 때에는 많은 인연과 많은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지난 몇 개월이 나에게 그랬다. 날마다 사람을 떠나보냈다. 물리적 거리로든, 심리적 거리로든. 그들은 떠나 갔고 나는 여기 남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듯한 평화의 감정이 밀려든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감정은 이번에는 '낮아짐'이다.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낮아짐'이다. 낮아질수록 가볍고 무거운 경험.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 장은 어떤 제목일지. 그리고 지나간 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소설책 읽듯 담담하게 읽어나간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길 때, 나에게 펼쳐질 일들에 대해 '기대'해 본다. 지금껏 일너난 일들이 어떤 씨앗이 되어 다음 장의 이야기를 끌어갈 것인가. 새로운 등장인물과 새로운 장소로 이야기 무대가 바뀔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인 인물의 갈등이 심화되거나 해소될 것인가?
아마도 이러한 '변화'를 내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누구라도 그러하듯이'가 다시 나를 찾아 온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