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씨의 소소한 일상] 마흔, 다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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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몇 살이세요?

...

요즘, 자주 이 질문에 멈칫한다. 서른다섯이 넘으면서 나이 셈하는 것을 게을리 하였더니, 내 나이가 올해 몇인지 자꾸 잊는다. 해가 바뀌었으니, 한 살을 더 먹었을 터인데, 서른다섯 이후로 몇 년이 흘렀는지가 가물가물하다.
나이를 정확히 알았던 서른 즈음까지는 작가들 중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라고 물었을 때 답을 못하는 분이 계시면 의아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런다.
나이를 잊는다.
세부에 온 뒤로, 일 년 내내 여름날씨다 보니, 더 나이에 무뎌진다. 혹한의 겨울을 나면, 저절로 봄이 오고 해가 바뀐 줄 아는데, 이곳은 그런 일이 없다. 나이 셈이 멈춘 것도 대략, 세부에 온 뒤부터구나.

문득 나이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새로 시작한 일본어 수업 때문이다. 스물여섯, 신출내기 편집자일 때 일본어를 배우러 와이비엠 어학원에 등록해 종로를 기웃거렸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바쁜 일정에도 저녁마다 책보를 싸들고 종로통을 지나 일본어 수업에 꼬박꼬박 출근 도장을 찍었다. 시작은 좋았지만 한 달도 못 채우고 학원을 그만 두었다. 숫자를 배울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디자인하우스에서 프랑수와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이라는 그림책을 편집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인쇄소에서 청색판과 적색판이 바뀌는 사고로 1대수를 전체 다시 찍게 되면서 하루 수업을 빼먹었다. 그날 이후, 일본어 수업을 종종 빠지게 됐다. 복잡한 동사 변형에 질려 버렸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그림책을 마음대로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열정이 그렇게 빨리 식어버릴 줄 그때는, 몰랐다.

15년 세월이 흘러, 다시 일본어 수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수업에서 선생님이 '나이가 어떻게 되요?'라고 묻는 바람에, 연도를 헤아려 가며 나이를 따지게 되었고 마흔 즈음에, 일본어를 시작하는 내가 스스로 신기하게 여겨졌다.
마흔에 시작하는 일본어라!
머리가 굳어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스물 중반에 일본어를 배울 때보다 훨씬 말랑말랑하고 재미있다. 물론 아직 초반이고, 숫자를 배우거나 동사 변형에 들어가면 고개를 저으며, 슬쩍 포기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당장은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나이를 떠올린 바로 그 세 번째 수업에서 나는 '잘자요, 달님'을 읽었다. 이제 히라가나를 읽혀 아주 더듬더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잘자요, 달님'을 읽-었-다. 스물 중반, 일본어를 배우던 때 소원했던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마흔 즈음은, 서른 즈음과는 다르다.
그때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시도도 했지만 일찍이 포기도 했다. 10년 뒤의 미래를 생각하며 정신없이 일로 좌충우돌했던 서른 즈음에는 몰랐던, 마흔 즈음은 '느리다'. 아이들을 키우며 양육으로 좌충우돌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가고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이 들며, 서른 즈음에 시도했던 어떤 일들을 다시 거들떠보게 된다.

마흔 즈음은, 서른 즈음에 10년 뒤처럼 조급치는 않다. 경험들은, 굳은 머리를 지혜롭게 한다. 그래서 서른 즈음에는 힘들게 해결했던 일들이 마흔 즈음에는, 수월하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며, 아이를 대하는 일이며, 일을 대하는 일이며, 미래를 대하는 일이 '수월'하다.
일본어 수업을 다시 들으며, 나는 마흔 즈음이 어느 나이보다도 공부하기에 좋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어려서는 머리는 총명하였을지 모르나, 경험이 부족하여 이해가 어려웠다면 이제 경험이 쌓여 많은 일들이 정돈되고 이해되니, 굳은 머리로도 배움이 즐겁고 여유롭다.
시험이나 결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미래를 위한 투자니, 미래를 위한 준비니 하며 스스로를 채근하지 않아도 되는 마흔 즈음이라면 어떤 공부도 즐겁게 할 수 있겠구나 싶다.

주변에 벗들이 하나둘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는 것을 보며, 나는 그들도 나와 같구나 생각한다. 커피를 배우고 발레를 배우고 다도와 전각을 배우고 민화를 배우고 가야금과 한삼을 휘두르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추는 한국 무용을 배운다.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하루하루 익혀, 시나브로 성장한 '실력' 앞에 그녀들은 마흔,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