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씨의 소소한 일상] 세부 말로복 호수의 처녀 뱃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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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말로복 호수(Malubog Lake)의 처녀 뱃사공

구글로 지도를 검색하게 되면서, 나는 세부에 커다란 호수가 2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작은 호수들이 수없이 많을 터이다. 하지만 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글 맵으로 확인하면 거의 시티 규모로 큰 호수 두 개가 눈알처럼 콕콕 박혀 있다.
그런 줄은 알았지만 방향 감각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나는, 그곳이 대략 오슬롭 가는 길 어디쯤으로만 짐작할 뿐, 가볼 엄두는 낼 수 없었다.

워낙 산이나 강, 호수 따위에 강한 흥미를 느끼던 나는 몹시도 그곳을 열망했다. 내 열망은 마침내 당시의 업무에 이어져 응답을 받았다. 취재차 부사이에 위치한 마장을 가는 길에, 그 호수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부사이에서 마장을 운영하고 있는 필리핀 마주는 그곳까지 말을 타고 4시간이면 간다고 했다. 자신은 그 길을 대단히 잘 아는데, 4시간에 걸려 말을 달리고 가면 호수가 나오고 그 호수가에서 야영을 하며 낚시한 물고기로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 코스가 1만 페소 정도 하는데, 나에게 원하냐고 했을 때 나는 고개를 아주 크게 주억거렸다. 그러나 인원이 4명은 되어야 한다고 덧붙이는 말에 잠시 우리 집 아이들을 떠올렸다가 그 아이들이 말을 4시간이나 탈 수 있을지와 어린이 할인을 받지 못할 경우, 4만 페소를 고스란히 낼 경우 1백만 원이나 든다는 생각에 미치자 고개를 그만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나는 그 호수의 이름이 말로복이며, 그 옆에 나란히 붙은 것이 세부의 상수원인 댐인 것을 알게 되었다. 위치도 톨레도 시티에 가까운 부사이 어디쯤.

그때가 아마도 추석이었을 것이다. 나와 아이들은 마침 갈 곳도 없었고 신문사도 쉬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차를 모조리 팔아치우고 회사 차는 고장이 나서 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잇는 교통수단은 렌트를 하거나 택시 대절을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렌트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방법도 잘 몰라서 택시 가사와 협상을 했다.

1500페소에 택시를 대절하여, 당시 거주하던 바나와에서 톨레도 시티의 말로복 호수까지 왕복하기로 하고 출발. 늘 준비가 없는 나는 아이들이 마실 물 조차도 챙기지 않고 아이들 셋만 덜렁 안고 택시에 올랐다.
앞자리에 내가 타고 뒷자리에 아이 셋을 쪼르르 태워서, 가는 동안에 세븐일레븐에 들려 생수를 사고 배가 고프면 햄버거 파는 데 들려서 햄버거를 사고 또 입이 심심하면 길가 부식거리를 사서 먹으며 톨레도에 있다는 말로복 호수를 향해 갔다.
가는 길에 미모사 나무가 우거져, 그 그늘이 끝없이 이어졌다. 길가에 작은 연못들이 간간히 보이는데, 수련은 또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지. 아이들은 창밖을 연신 내다보고 수시로 '카라바우'를 외치고.
굽어진 도로를 따라 가는데, 누구도 차선을 지키지 않아 아찔아찔한 순간도 여러 번. 커다란 관광버스가 정기적으로 지나는 것으로 보아, 톨레도 시가 큰 도시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2시간이 넘게 달렸다.

기억에 세부 에스알피를 타고 가다가 나가 시티에서 우측 도로로 꺾어서 쭉 가다보면 톨레도 시티에 못 미치는 어딘가에서 다시 우측으로 꺾어져 들어가는데 그곳은 비포장도로라, 차가 엉망으로 튕겨댔다. 택시 기사의 얼굴 표정이 몹시 일그러졌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호수의 위치는 정확하게 모르고 출발한 데다, 택시 기사도 초행이라 물어가는 길이었는데 있다. 하지만 처음 온통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택시 기사도 시간이 지나자, 이렇게 물어 가는 여행의 재미를 느꼈던지 점차로 호수를 찾아가는 일을 즐기기 시작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정신없이 들어가던 때에는, 기사가 "이제 다 온 것 같다"며 싱긋 웃기까지 했던 것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말로복, 그 넓은 호수를 만났을 때 우리 아이들의 감회란.
세상에, 세부에 이런 호수가 있었다니! 청평 호수나 산정 호수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처녀 뱃사공이 있었다.
2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모터로 가기는 하지만 노를 저어야 하는 나룻배는 너무도 낡아서 도대체 저 배로 호수를 건널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배를 타고 호수의 작은 섬이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고 섰다. 줄이 길어 한번에 배를 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호수 입구의 마을에서 점심으로 현지 사람들이 즐겨 먹는 바비큐와 반찬 따위를 시켜 밥과 함께 먹고 배를 타러 갔다. 호수로 배를 타러 가자면 그늘진 곳이라고는 없는 벌판을 오백여 미터 걸어가야 해서 아이들은 여벌로 가져온 티셔츠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아마도 우리는 그동안 세부에서 보았던 걸인들의 땡볕을 피하는 법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다. 누가 먼저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주섬주섬 여벌옷으로 챙겨온 티셔츠 목덜미로 얼굴을 내밀고 쨍쨍한 햇볕을 피했다.

그렇게 어른 하나와 아이 셋이 나룻가에 도착해 흥정을 붙이고 나룻배를 500페소에 빌려 호수를 1시간 동안 돌기로 했다. 우리는 호수 전체를 돌아보았는데, 1시간이 꼬박 걸렸다. 처녀 뱃사공은 흥정을 할 때, 퍽퍽하게 굴더니 막상 배에 태우고는 노는 재미가 들었던지 우리를 어딘가에 내려주었다.

"가 보세요. 저기 보이는 동굴을 지나면 폭포가 있어요."

우리는 처녀 뱃사공이 일러준 대로 터널을 지났다. 그러니 깎아 지르는 절벽이 나왔고 그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계단은 손잡이가 없어 몹시 위태로웠는데,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아이들이 계단을 잡고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막내를 붙잡기 위해 따라 내려갔고 결국 우리는 그 께단을 다 내려가 폭포 아래에 서 있게 됐다. 아이들은 몇 시간이라도 그곳에서 놀고 싶어했으나, 나는 머물 수 없었다. 1시간으로 이야기했던 처녀 뱃사공과의 약속도 그렇고 그 처녀 뱃사공을 기다릴 주민들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돌아가려고 보니 계단이 아슬아슬 아찔했다.

무슨 정신으로 그 계단을 다 올라와 처녀 뱃사공에게 돌아갔는지가 아득하다. 솔직히 나를 제외하고 세 아이들은 너무도 힘차게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서 막내조차도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아 서운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말로복 호수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해가 벌써 뉘엿뉘엿. 이날 이후로 우리는 한동안 자연 탐방에 나섰다. 세부의 곳곳을 돌아보고 책을 하나 써야겠구나 생각했던 게 이때다.

1년이 넘게 바다 호핑과 리조트만을 다녔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날 하루 동안의 경비도 2500페소가 안 들었다. 교통비를 제외하고 나면, 거의 쓴 돈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후회도 하였다. 내가 잘 알았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썬크림을 듬뿍 발라왔을 거고 양산도 하나씩 챙기고 아니면 챙이 넓은 모자를 스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낚시를 챙겼을 것이다. 양동이와 낚시대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어, 나는 반드시 다음에는 낚시대와 챙이 넓은 모자를 챙기고 택시가 아니라 차를 렌트하리라 했었다. 그리고 벌써 1년하고도 반년이 훌쩍 흘러 버렸따.
이 글을 마치고 5월 방학 기간에는 아이들과 세부를 꼼꼼하니 구석구석 다 들여다 보고 다녀야겠다.

아, 갑자기 그 처녀 뱃사공이 사무치게 그립구나. 그녀는 안녕하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