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씨의 소소한 일상] 요리사가 꿈인 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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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 콩세알 도서관을 개관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오후 늦게 엄마와 함께 온 히나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고 들어와 책장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느긋하게 책을 넘기더니, 잠시 후에는 함께 온 친구와 체스를 두었다. 콩세알 도서관을 열었을 때, 내가 바랐던 모습이었다.

다시 히나를 만난 것은 내가 콩세알에서 토요일마다 진행했던 한국사 수업 시간에서였다. 한국사 수업은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나눠 진행했다. 히나는 고학년 반이었다. 고학년 아이들 중에는 한국에서 막 온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러니까 10명 중 예닐곱은 세부 거주 5년차 이상으로, 세부에서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한국어로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아이들이 수업에 임하는 태도였다.

"역사란 무엇일까?"
역사학자 E.H Carr의 책 제목(참고로 이 책은 대학 교재이다)을 칠판에 크게 쓰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첫 수업을 준비하던 나는 아이들이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배울 것이, 한국사이기 이전에 역사라는 말을 하고 싶어, 이 제목을 꺼내들었다. 막상 칠판에 이 내용을 적으면서도 혹시, 아이들이 이 제목 때문에 역사가 재미없다고 느끼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했다. 그런데 히나가 "과거 이야기!"라고 외치자, 나머지 아이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쏟아냈다.

영화요!
물건이요!
사람들이요.
지나간 시간이요.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히나는 질문도 대답도 거침없이 쏟아냈다.
내가 진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되었다가 유인원이 되었다가 바다의 물고기가 되었다 마침내 먼지가 되었을 때 아이들은 자신들의 상상을 마음껏 펼쳤고 심지어는 "그러니까 이것도 역사가들이 상상한 거지요?"하는 카의 이론에 거뜬히 근접해 갔다.

그렇게 나의 한국사 수업을 '신 나게 만든 친구'가 바로 히나다. 히나의 질문에 대비를 하기 위해, 나는 수업 준비를 조금 더 신경 쓰게 되었다. 늘 궁금한 게 많은 아이라, 엉뚱한 질문도 하고는 했다. 아이의 질문을 키워주는 선생님이지만, 더 많이 찾아봐야만 했다.
히나는 그날 이후 언니와 함께 매주 도서관에 왔다. 항상 책을 빌려갔는데, 내가 다가가 "넌 무슨 책을 좋아하니?"하고 물으니 뜻밖에도 "요리사가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히나의 어머니가 요리를 즐겨 하신다고 했다. 나는 히나에게 프랑스와 스위스, 이탈리아의 요리들에 이야기하면서 역지사지 시리즈를 권했다. 히나는 그 자리에서 책을 펼쳐 살펴보더니 세 권의 책을 모두 빌려갔다.

그 뒤에도 히나가 빌려간 책의 목록을 살펴보면, 요리에 관한 책이나 꿈에 관한 책,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나 역사에 관한 책들이 많은데 이 모두가 '훗날 요리사가 되려는 아이에게 너무도 어울리는' 책이라고 잠시 생각했다.

아주 옛날, 식재료가 풍부하지 않았던 때에는 요리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고장에서 나는 음식을 잘 알고 그 식재료를 잘 다루는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비용만 지불하면 한국에서 런던에서만 생산되는 식재료를 공수해 식탁에 올릴 수가 있다.
때문에 앞으로의 요리사는 세계 각국의 문화적 특징이나 역사를 잘 아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 된다. 신라호텔 주방장이었던 한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손님의 국적에 따라 약간의 조리를 달리하기도 하며, 식재료를 바꾸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게 총주방장 판단 아래 이뤄진다고 했다.

실제로 예전에는 요리학원을 졸업하고 조리실에서 바닥부터 겪어 총주방장까지 올라가는가 하면 최근에는 유명한 요리학교를 나오기도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 종사하다가 요리사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보통은 몇 개 국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책을 만들면서 보면, 심지어 글솜씨가 좋은 경우도 많다.

나는 지난 10개월 가량을 히나가 대출하여 갔던 책들의 목록을 보며 생각했다. 이 책이, 히나의 인생에 어떤 씨앗이 되어줄 것인가?
히나가 다니는 브라이트는 개학을 7월에 해서, 앞으로 한 달 동안 히나가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가 가기로 했다. 나는 앞으로 1개월동안 아침마다 이 아이와 만날텐데, 벌써부터 그 시간이 콩다콩닥 기다려진다.

사람은 아이 때부터 이렇게 향기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사람의 향기가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