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씨의 소소한 일상] 뜨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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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늘 뜨개질은 막내고모에게서 배웠다. 흰 실로 탁자 보를 며칠 만에 완성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작은아씨들이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뜨개질하는 장면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때 나이가 8살. 아직 단 뜨기는 못하고 코만 잡았다 풀었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느 날 단을 뜨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다였다. 코를 늘리거나 코를 빼가며 모양을 내는 일은 나에게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 막내고모가 떴던 아름다운 레이스를 나도 뜨고 싶었지만 10살쯤, 코바늘뜨기를 포기하고 대바늘로 넘어갔다. 코바늘뜨기로 친구에게 주려고 털목도리를 떴는데 마감이 엉망인데다 모양도 예쁘지 않고 신축성도 없어서 결국은 선물을 못하고 바느질함에 처박아 버렸다.

그리고 얼마 전의 일이다. 대략 30년 세월이 흘러 성당에서 바자회 때 팔 수세미를 뜬다고 하여 한 뭉치의 털실을 받았다. 한번 떠 보고 싶은 마음에 코바늘을 찾아 떠보았는데 예전에 배웠던 기억이 가물가물 나며 첫 번째 수세미를 완성했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도서관에서 놀던 서진이라는 친구가 내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와, 멋지다!" "정말 놀라워요." "예뻐요." 하더니 딸기를 뜰 수 있냐고 물었다. 아이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럼!"하고 대답을 해 놓고 순간 걱정을 했다. 평생 단 한 번도 딸기는 떠본 적이 없는데. 딸기 모양을 뜨자면 코를 점점 늘려가다 줄여야 할텐데... 머리 속은 복잡했지만 손은 이미 코를 잡으며 뜨개질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10분 만에 돌잡이 손바닥만 한 딸기를 떴다. 내친김에 이파리도 떠 보았다. 이파리도 떠졌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주문이 쇄도했다. 분홍색 하트, 나무, 별모양, 사과, 딸기, 포도! 놀라운 일은 이어졌다. 거의 대부분의 모양을 그럴 듯하게 떴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아이들에게 코바늘 뜨개질을 가르칠 겸 하여 두 세트의 아크릴사를 주문했다. 그리고 날마다 도서관에서 여자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지갑을 떴다. 사과모양 핸드백, 알록달록 애벌레 느낌이 나는 핸드백, 찻잔처럼 생긴 지갑, 수박 모양 핸드백까지.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10살 때, 나는 이미 코바늘 뜨개질을 완성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술을 배웠지만 코를 늘리고 빼는 과정을 통해 어떤 모양을 만들 수 있는지를 상상하고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코바늘을 뜨지 않고 보낸 30년의 세월 속에 그때 완성되지 않았던 코를 늘리고 빼 원하는 모양을 완성할 수 있는 사고력이 완성되었다.

가끔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고는 한다. 예를 들면 끊임없이 자유형만 한 달씩 배우기를 10년째 반복하던 끝에 세부에 와서 10번의 개인지도를 받고 마침내 자유형과 평형, 접형, 배영을 배우게 되는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물론 폼은 엉망이고 어색하다고 치고.
그렇게 배운 수영 실력으로 아일랜드 호핑을 나가 구명조끼 없이 바다에서 수영을 시도했다. 몇 번이나 시도를 하는데 몽이 뜨지 않아 혼쭐이 나고서야 또 한 동안 바다 수영을 접어두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명조끼를 벗고 바다에 들어갔는데, 몸이 무리 없이 바다에 떴다. 바닷물이 든든하게 내 몸을 받쳐주었다. 아, 그 황홀감이란!

나는 우리의 몸도 우리의 뇌도 어떤 정보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 두 가지 사건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제야 아이들이 이해가 되었다. 한글을 가르쳐 보면 그런 경우가 있다. 한글을 열심히 가르치는 동안에는 아이가 한글을 읽는 것은 물론 관심도 없고 이해도 못하는데 한글 지도를 그만두고 난 뒤에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이다.

"우리 애가 읽어요, 선생님!"

이런 경우도 흔하다. 긴 연휴를 앞두고 수업을 할 때만 해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아이가 별다른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연휴 끝에 갑자기 읽고 쓰게 되는 것이다.

30년 공백은 다소 길지만, 뇌는 그런 성격이 있다. 공백을 필요로 한다. 휴지를 주어야만 쉬는 동안에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데이터를 마구잡이로 밀어 넣기만 하고 쉬지 않으면 그 데이터를 다 임시 저장 창고에 넣어 폐기시켜 버리게 된다.

때문에 쓸모가 있는 데이터라는 것을 뇌가 알기 위해서는 두 번 혹은 세 번 반복을 해주어야 하며 반드시 두 번 혹은 세 번 반복적으로 입력된 데이터를 쉽게 꺼낼 수 있는 출력이 용이한 자리에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뜨개질을 통해, 나는 나의 기능 하나를 완벽하게 알았다. 알았으니 써 먹어야지. 아이들에게 절대 공부 전에 운동으로 워밍업을 시키고 공부를 마치고 나면 충분히 쉬게 하리다. 많은 정보를 쌓기 보다는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을 키워 주리라. 그러면 가르쳐 주지 않아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아이를 충분히 놀리고 뇌를 쉬게 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