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씨의 소소한 일상] 즐거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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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가 기다렸던 것은 '즐거운 편지'다. 그러므로 D는 줄곧 빨간 우체통을 떠올리며 잠이 들고 잠에서 깼다. 몇 차례 한국에서 빨간 우체통을 들여와 운영하는 도서관 앞에 세우려 했다. 시도는 번번이 틀어졌고 이제 D는 4개월 뒤 한국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즐거운 편지를 수신할 수 있는 빨간 우체통이 D의 도서관 앞에 놓일 가능성이나 D가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를 수신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D는 포기를 모른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살짝 과도하게 살이 찌고 흰머리가 급격하게 늘었으나, 외모가 아닌 자세의 측면에서)을 하고, 즐거운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D가 기다리는 것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겨진 메시지가 아니다. 요즘엔 보기 힘든 손편지다. 삐뚤빼뚤한 글씨 사이로 마음을 녹아내리게 만들 두어 방울의 눈물이 말라붙어 있으면 더 좋을 거라고 D는 생각했다. 편지를 붙일 때 망설이며 떼지 못했던 떨리는 손길, 그 체온을 느끼고 싶다고.

어쩌면 편지는 폭우가 쏟아지던 날, 보내는 이의 가슴에 안겨, 우체통 앞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겉봉의 이름은 퍼붓는 빗줄기에 번져 수취인 불명이 됐을 수도 있다. 애초에 수취인 불명일지도 모르는 그 편지가 우체통에 들어있다고 상상하는 일은 D의 즐거움이었다.
바람 거세던 어느 날, 아무런 사연 없는 나뭇잎 한 장이 그 우체통의 허기를 채워도 좋다고 D는 상상했다. 그냥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나뭇잎 한 장이면 기다림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D는 그러므로 그 시간들을 기다렸고 그 시간들을 더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발걸음을 수신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한 자리에서 기다렸던 D가 아닌가?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고 가지고 있던 사과 한 알과 낡은 면바지, 셔츠, 낡은 노트까지 D에게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나눠주며 자리를 비우지 않았던 D가 아닌가? 그러다 벌거벗은 몸으로 눈인지 먼지인지 모를 것에 영영 갇혀 버린 D가 아닌가?

해가 지고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 내리는 사소한 일상 속에 D가 앉아 있을 것을 배경으로 웃고 떠들고 목소리를 높이며 다투었던 그 문장들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발신되었어야 했다. 다만 우리는 그 문장들을 수신하려 기다리는 D의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그동안에 비도 눈도 그쳤으며 해가 뜨고 꽃이 피어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는 것 같은 문장들이 또 다시 삐뚤빼뚤 글씨로 발신될 것이다. 그리고 D는 기다릴 것이다.

D가 기다렸던 것은 '즐거운 편지'다. 그러므로 D는 줄곧 빨간 우체통을 떠올리며 잠이 들고 잠에서 깼다. 비록 D는 4개월 뒤 한국 집으로 돌아가야 하며 즐거운 편지를 수신할 수 있는 빨간 우체통이 D의 도서관 앞에 놓일 가능성이나 D가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를 수신할 가능성은 당장에 희박함에도.

그럼에도 D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편지를 기다릴 것이다. D가 기다리는 것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겨진 메시지가 아니라 흔히 보기 힘든 희귀한 손편지다. 삐뚤빼뚤한 글씨 사이로 마음을 녹아내리게 만들 두어 방울의 눈물이 말라붙어 있는, 편지를 붙일 때 망설이며 떼지 못했던 떨리는 손길, 그 체온이 남아있는. 언제 수신될지 알지 못하며 D가 그토록 기다리는 그 편지. D는 그 편지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스스로 알기에.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D는 믿는다. 다만 그때 D는 자신의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