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씨의 소소한 일상] 집으로...

집으로.jpg

비행기 티케팅을 마쳤다.
2016년 1월 23일 새벽 2시 비행기다. 아마도 그날 오후 늦게 4시와 5시 사이에, 나는 라면 상자 다섯 개를 집 앞에 쌓아놓고 아이들과 사진을 찍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 며칠 전 자라 세일 기간 중 구입한 겨울 점퍼와 긴소매 옷을 입고 있을 터이다. 세부의 낮 기온은 26도 정도로 하늘은 높고 구름은 없을 것이다. 그 모습으로 우리는 세부를 떠날 것이다. 세부에서의 4년 그리고 사흘간의 체류가 마침표를 찍겠지.

이제 어디로 가는가? 나는 10년 된 자작나무 책상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책상에서 나는 집을 떠나기 전 생계를 위해 숱한 책들을 썼다. 그리고 돌아가 앉은 책상에서 또 어떤 책들을 쓸 것이다.
어떤 일들은 수필의 형태로, 아이들과 겪었던 일들은 그림책이나 이야기책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나의 4년 사흘간의 세부 생활은 그렇게 어떤 사람들과 종이 위에서 문자로 만날 것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그 집, 나의 서재랄 것도 없는 작은 방에 긴 자작나무 책상에서 나는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사랑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무자 언어로 전환시켜 나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그토록 나를 갈망하는 남편과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쓰며 멈춘 시간을 버틴 자작나무 책상이 기다리는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4년 그리고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일에 대한 무게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고 가족의 소중함을 배웠고 무례한 사람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고 수종한 사람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웠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고 아이들을 위해 써야 할 책과 쓰지 말아야 할 책의 구분을 할 수 있는 안목을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다워졌으며 엄마다워졌으며 아내다워졌으며, '나' 다워졌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힘들었으니 이제는 아무 것도 못하겠죠?
그래서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더는 아무 것이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앞으로는 나에게 맞는 일을 꼭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나의 용기와 지혜를 모아 일할 것 같습니다.

떠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냐마는, 떠나는 사람으로서 세부에 대해 꼭 할 말이 있다. 세부는 아름다운 곳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세부에서 내가 가졌던 평화는 쉽게 얹지 못할 것 같으며 4년이라는 시간이 꿈 같이 여겨질 만큼 모든 순간이 아찔하게 행복했다. 도서관을 운영하는 동안 말의 가시에 찔리어, 잠시 내가 사랑했던 세부에 대해 잊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보니, 이곳이 그토록 아름답더라. 사람도 좋은 사람들만 만나게 되고 좋은 일만 생기고 좋은 기운만 나에게 모이더라.

어찌나 감사하고 행복하고 평온해지던지, 아이들을 보면 그냥 고맙고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서럽고 아프고 속상했던 그때와 행복과 감사가 넘치는 지금 나 사이의 달라진 것이라고는 '나' 뿐이다. 모든 조건들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직 나로 인하여 세부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세부에서의 소중한 경험에, 대단히 감사한다. 아마도 7개의 도서관을 운영하겠다는 꿈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화' 될 것이 확실해졌다. 이제 내가 일체유심조를 이해했고 나를 이해했으므로 나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대화를 나눠야 할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말아야 할 사람, 그러한 분별은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니 말이다.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다.

그동안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친절을 행사하며 착한 사람인 행세를 하여왔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에게 미쳤다 하고 사기를 친다고 하고 믿을 수가 없다고 의심하고 또 의심했을 것이며 불신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집으로 향하는 나는 딱 라면 다섯 상자만큼의 묵은 옷가지와 신발과 아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몇 가지 물건들만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도서관에 관한 모든 것들을 다 처리하고 깔끔하게 빈손이 되어 돌아가는 내 마음에는 넘치는 행복이 차 있다. 나는 인도 여행을 했던 25살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왔다가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 집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10년 이상은 세부에서 살았던 추억만으로도 멋지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세부와 콩세알의 기억과 콩세알에서 만난 모든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나의 뇌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동안 세부 생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담담하고 편안한 필체로 전해주던 이현정 작가(콩세알 도서관 관장)의 "달리 씨의 소소한 일상" 칼럼이 이번호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교민연합뉴스에 좋은 글을 보내주신 이현정 작가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