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 살고 보니 가끔 현지인들 중 어른들의 심장 안에 남아있는 한국인은 신동파입니다. 그분은 아직도 필리핀에서 전솔로 남아있습니다. 1970년대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는 '신동파 양복점', '신동파 빵집'등 '신동파'라는 이름을 붙인 상점들이 즐비할 정도 였다고 합니다.
신동파가 이처럼 인기를 끌게 된 계기는 1969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ABC농구선수권 대회였다고 합니다. 당시 필리핀은 아시아 농구 최강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결승에서 만난 한국팀에서 신동파가 무려 50점을 넣는 활약에 힘입어 95-86으로 승리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필리피노 어르신들에게는 신동파는 농구의 신입니다. 헌데 제가 UC 대학 강의 중 한 가지 발견한 것은 피노이 젊은이들 가슴 속에 새로운 한국인이 강렬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국인은 다름아닌 '산다라 박'입니다. 사실 제 나이는 같은 한국인이지만 신동파를 그저 기록 속에만 남아있는 현실적인 친근감은 깊지 못한 인물로 느끼지만, 산다라 박은 아직도 감동으로 존재하고 제가 세부섬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산다라 박
박산다라(1984년)는 부산에서 살다가 무역업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따라 1995년 초등학교 5학년때 필리핀에 왔습니다. 식구로는 부모님과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산다라의 이민 초기 생활은 너무나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외국인이라 집중된 시선을 많이 받았고 또한 어눌한 영어와 필리핀어 실력 때문에 놀림을 자주 받았으며 낯선 환경에 두렵고도 무서워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한국을 떠난다는 것부터가 싫었어요, '나 가수 해야 돼'라며 안 간다고 얼마나 떼를 썼다구요. 필리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며 짐을 싸 집을 나간 적도 있을 정도예요. 비록 아파트 복도에 혼자 몇 시간 머물러 있다 들어오긴 했지만,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땐 필리핀 말도, 영어도 잘 못해 말을 아예 안 하고 지내기도 했죠.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에는 벙어리인 줄 알았대요. 선생님들까지도 말이죠. 말 자체를 이해 못하니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빵점을 받은적도 있었고... 아무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학교 행사에서 만난, 현재 필리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이던 친구가 필리핀 방송국 ABS-CBN의 "스타 서클 퀘스트"라고 하는 스타가 되기 위한 서바이벌 쇼의 오디션에 응시해 볼것을 권하여 산다라는 쇼에 참가하게 됩니다.
총 7천 명이 지원해 무려 6개월간 뜨거운 경쟁을 하게 됩니다. 콘테스트 초기부터 산다라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최종 다섯 명이 확정되는 마지막 탈락자 선발전에서는 약 50만 통의 휴대전화 문자 득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었기에 2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후 필리핀 최고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KBS-2TV 휴먼다큐멘터리 '인간 극장'을 통해 알려지면서 필리핀의 보아라는 별명으로 불려집니다. 산다라라는 이름은 "슬기롭고 총명하고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김유신 장군의 아명(兒名)을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그녀의 인기의 비결을 물었을 때 겸손히...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노력은 누구나 다 하는 거고, 그냥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노래도, 연기도, 필리핀어(타갈로그어)도 어느 것 하나 똑 부러지게 잘하는 건 없지만 잘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것도 같고... 또 지금 필리핀에선 한국 드라마가 인기거든요. '겨울연가', '가을동화'에 이어 요즘은 '파리의 연인'이 인기 최고죠. 그 덕도 좀 보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 왜 산다라가 필리핀에서 어떻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는가를 분석해보면 예쁜 얼굴에 착하게 행동하며 필리핀 사람들을 존중하는 그녀의 태도였다고 생각됩니다. 제일 결정적 순간은 오디션 도중 팬들이 야유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아주 공격적으로 묻는 심사위원의 압박 면접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린 것으로도 유명하며, 우는 장면 때문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껴 투표한 이도 많았습니다. 산다라가 울면서 한말은 'Nahal ko kayo(여러분 사랑해요)' 였습니다.
산다라 박의 대표적인 노래는 '인 오어 아웃'이라는 노래입니다. 가사를 소개하면 "In or out, am I in or out?(나는 당신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 있는가?) In our out sana'yokay sa'yo(당신과의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At di nakomagtatampo(내가 화가 나질 않았으면 합니다). Pag-ibigko'y in or out sapusomo(내가 당신의 마음속에 있든지 없든지간에)... Pilipit man angtagalogko(나는 따갈로그가 서툽니다) Patiangenglishko(영어도 잘 못합니다). Ay Mahal Ko Kayo(그러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지금도 10년이 지난 이 노래 In or Out을 즐겨 듣는 편입니다. 왜냐면 선교사인 제 신분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땅에 23년을 살아 왔는데 그렇다면 나는 피릴핀 세부아노 사람들의 가슴 안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아직도 그들의 마음 안에서 떠나있는가? 늘 고민해봅니다.
그 이후 산다라박은 2007년 한국으로 건너가 YG와 함께하며 2NE1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1년 5월 16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세미나에 초청이 되어 SNS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에 대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녀가 말하는 대중과의 소통의 원칙은 "진실성, 흥미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강조했습니다.
마음의 진실성
우리 세부가 낳은 최고의 필리핀 한인 연예인은 박진리(1988)입니다. 진리는 제가 한글학교에서 가르친 경험도 있는데 현재 마닐라에서 방송계 연예인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세부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했던 의사, 약사입니다. 진리는 현지 방송에서 자신은 겉모습은 한국인이지만 속은 세부아나라고 언제나 소개합니다.
제가보기에 현지어를 잘 못했지만, 그것을 당당히 밝히고 마음으로 필리핀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었던 산다라박처럼 박진리 양도 더욱 적극적으로 필리핀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고 더욱 진실한 바람으로 세부아노르르 가족이자 형제로 여기고 동질감을 갖는다면, 팬들은 그의 진정성을 느끼게 되고 언젠가는 산다라 못지않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부섬에 사는 우리는 어떤가요? '나는 세부아노를 잘하지 못합니다. 나는 영어도 서툽니다. 하지만 세부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언젠가 현지인 이웃이, 친구가 당신의 진심을 알아치릴 수 있게 생활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세부의 삶에서 성공을 하려면 산다라처럼 가장 진실하게 다가서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산다라가 진심을 담아 눈물로 호소했던 말 "Mahal Ko Kayo(당신을 사랑합니다)"을 세부아노로 속삭여 봅시다. "기히국마 꼬 이까오(Gihigugma ko ikaw,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필자는 23년 전 세부에 정착하여 현재 한사랑 교회 목사, 코헨대학교 세부분교 학장에 재임중이며 UC대학 HRM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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