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서 살고보니] 가업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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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에 살고 보니 다음 세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해보면 사실 특별히 물려줄 재산이나 기술이 없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참 아쉬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를 않았을까 반성도 해봅니다.

살아가 보면 볼수록 인간 스스로 세워져 나아가는 삶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더욱 더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세부에서의 나태해진 모습을 자책해보기도 합니다. 처음 도착했던 이 세부섬과 현재의 모습은 물론 엄청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강산이 2번 변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내 자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현지를 약간 무시하며 희망을 찾기 어렵다고 보아왔던 시각에서 현지인들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보물섬으로 부정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막상 이 에부섬에 살고 보니 이 섬의 역사를 알게 되며 그동안 이 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던 수많은 현지인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들을 보게 되면서 겸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세부의 모습에는 그동안 수많은 현지인들의 삶과 애환이 있었던 것입니다.


심수관 씨 유산

제가 처음 세부에 도착해서 알게 된 현지인은 중국인이었습니다. 그분은 林씨 가문인데 그분은 벌써 2대째 세부에 살고 있으며 다행히 저는 1대로 세부섬에 도착한 그분의 아버님도 뵐 수가 있었지만 연세가 있으셔서 대화는 나눌 수 없었습니다. 이분들은 중국남쪽 광동성에서 왔으며 포목상을 기반으로 현재는 빌딩 4채를 소유하고 임대업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Mr. Lim은 현지에서 법과 경영을 전공하고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은 한국인들은 세부에 와서 사업에 성공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 중국인들은 세부섬에 와서 온갖 고생을 해서 오늘의 부를 이루었는데 한국인들은 너무나 쉽게 세부섬에서 성공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한 개인에 의해 사업을 이루어 나가는 게 아니라 몇대에 걸쳐 노력을 하는데 한국인들은 대다수 자신의 대에서 성공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분들 이야기를 소개하면 자신의 아버지는 세부섬에 도착해 오로지 자식이 세부에서 성공하기를 위해 법대에 보냈고 부모들은 모든 희생을 다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한국인들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한 본인은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가 하시던 포목상을 이어받습니다. 또한 이분의 이야기로는 자신은 법을 공부해 외국인으로써 사업을 하는데 법적인 피해를 안 당하려고 했는데 사업을 하다 보니 법보다는 세무관계가 훨씬 중요하기에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회계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임씨네 가문은 벌써 3대에 걸쳐 포목상을 하고 있으며 온가족들이 모든 노력을 다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현재는 그 손자까지 세부에서 4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이곳 세부섬에 정착하는 데는 벌써 4대가 걸린 긴 여정이었습니다.

이제는 일본에서 15대째 도자기를 굽고 있는 심수관 씨 가문을 소개합니다.
1597년 8월 조선의 전라도 남원성에 도공이었던 심당길 일가는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끌려와 가고시마사츠마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심당길일가 뿐만 아니라 80여명 다른 도공도 함께 끌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군의 포로로 끌려오면서도 "고향의 흙과 유약 그리고 한문과 한글 서적을 배 밑창에 숨겨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곳에 정착할 때 일본은 무사계급의 신분을 주었고 이들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도록 최대의 예유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제일 낮은 신분이었던 이들이 일본에서 예술가의 신분과 위치로 있게 되면서 도자기를 만들 수가 있었는데 이들이 만든 초기 작품으로 유명한 히바까리다완은 사쯔마의 불을 사용하지만 조선의 흙과 기술을 사용하여 만든 도자기를 말합니다.

심수관요가 있었던 지역은 에도시대까지도 대부분 조선 이름을 사용하고, 조선의 풍속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조선어가 보존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당길의 12대손 이후로는 심수관이라고 하는 이름을 계속해서 써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12대 심수관 후손 때 1875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물관에 출품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 '대화병환조' 때문입니다. 혼신을 기울인 이 작품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자 심수관 이름을 자손들이 물려받아 현재는 심수관 15대로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15대를 이어오는 동안 조선에서 가져온 서책들과 또한 자신들이 만든 일본어 교본들도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수관은 1874년 옥광산도기 제작소(훗날 심수관요)를 설립하게 되고, 동경에 지점을 내면서 판매량을 늘리고 기술개발을 통해 도자기 제조 수준을 높여 나갔다고 합니다.

또한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상을 받으면서 명성을 높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바 료타로 작가는 '고향을 어찌 잊으리'라는 심수관 가문이야기 소설도 썼습니다. 심수관가의 집안에는 커다란 두 폭 병풍에 넉 자의 휘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白世淸風(백세청풍)'. 주자학의 비조인 주희의 글입니다.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13대 심수관이 탁본을 떠서 병풍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13대는 도공의 아들로 일제시대 명문 가고시마고교(제7고)를 나와 교토대 법학과를 졸업한 수재입니다.

하지만 결국 향리에 돌아와 도자기를 구우며 아들 14대를 와세다대 정경학부에 진학시켰습니다. 참으로 명석하고 학구적인 인물들이지만 도자기 가문의 유산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학력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도자기를 굽습니다. '백세청풍' 비는 충절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 숙제를 기리기 위해 1738년(영조4년) 해주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 작은 비석 하나의 탁본이 이들이 15대에 걸쳐 도자기를 굽게 되는 정신적 유산 중 하나인지 모릅니다.


곰곰히 고민하고 준비해야할 '당신의 유산'

오늘 세부섬에 23년을 선교사로 살고 있지만 과연 내 후손들이 앞으로 15대에 걸쳐 심수관 가문처럼 지속 시킬 수 있는가를 반문해볼 때 너무나도 조심스럽고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오늘 세부섬에서 자리를 잡은 현지인들과 중국인들은 벌써 몇 대에 걸치 피와 땀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우리 한인들은 대체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성공을 원하고 자신의 세대에 무엇을 이루어보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사실 심수관 가문도 그 많은 고생을 도자기 굽는데 헌신을 했지만 빛을 본 것은 12대에 걸쳐서야 이루어 낸 것이었습니다. 1597년에 일본으로 끌려와서 278년이 되서야(1875년) 드디어 빛을 발하기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마닐라에 가면 경찰청(Camp Crame)에서 경목 건물사무실에서 명예장군 위치에 있는 한국인 전대구 선교사는 그만의 영향력을 가지고 정부주요 인사들과 쉽게 접촉을 하는데 그분이 저에게 하는 말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위치와 지위만을 바라보는데 그러나 정작 자신이 근 30년 전에 빈손으로 수많은 고생을 통해온 과정은 아무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늘 저의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오늘 세부에 거주하는 우리교민 여러분 우리가 이 섬에 정착해 나아가는 길은 오랜 아픔과 눈물의 과정이 있지만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가업의 유산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필자는 23년 전 세부에 정착하여 현재 한사랑 교회 목사, 코헨대학교 세부분교 학장에 재임중이며 UC대학 HRM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