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서 살고보니]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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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에 살고보니 세월이 화살처럼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김필이 부르는 '청춘'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물론 1981년 산울림 제7집에 실려 있던 곡이었지만 올해 초 인기를 끌었던 '응당하바 1988'의 OST에 김필이 부르면서 최근까지 한국사회에 감동을 주는 곡이 되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청춘을 떠올리며 또한 흐르고 있는 세월 앞에 몸부림 치고 살아갑니다. 세부섬에서 청춘을 다 보낸 제 삶을 돌아다보며 오늘도 수많은 청춘들이 새로운 도전을 가지고 이 섬으로 도착하는 수많은 청년들은 그들의 청춘을 어떻게 세부섬에 남기고 있는지 늘 청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청춘

산울림 김창완 씨가 노래를 만들고 직접 노래한 '청춘'이라는 곡을 소개하면 "언젠간 가겠지 푸프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슾러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나를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정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 동산 찾는가."

김창완 씨의 원곡을 듣다 보면 리듬은 한국전통 장송곡 상여소리의 리듬이 생각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노래 발표 후 30년이 지난 최근 김필이 부른 '청춘'은 서양식 진혹곡의 느낌을 가지게 하는데 실제로 곡 중간에 나팔소리가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나팔소리가 너무 슬프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는 이 노래처럼 아까운 19살 배고픈 청춘을 애도하는 진혼곡이 시민들의 가슴을 통하여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8일 오후 5시 57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고장난 자동 스크린 도어를 고치러간 젊은 꽃다운 청년 비정규직 청년이 들어오는 전동차에 치여 죽은 사건에 시민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가 남긴 가방에서 나온 건 스테인리스 숟가락과 나무젓가락 그리고 컵라면 한 개뿐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분주했을 노동의 현장과 라면 국물이라도 떠먹으려 수저를 챙겼던 배고픈 청년의 마음을... 구의역에  마련된 추모의 벽에는 1,200개의 포스트잇이 붙어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나도 당신처럼 영세 업체에 취업해 일하는 공고생이다. 당신의 죽음을 보면 남 일 같지않다' 또 다른 청년은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건설 현자에서 안전띠 없이 아시바(비계)타고 올라가 작업한 적이 셀 수도 없다"며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 김군과 다를 게 없는 처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청춘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현실입니다.


인생

당나라의 시성 두보가 그가 47세 되던 758년에 지은 것으로 '곡강시'엔
조정에서 돌아와 하루하루 춘의를 잡혀,
매일강두에서 취하여 돌아오네.
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흔히 있지만,
인생 칠십은 고래로 드물도다.

인생이 70을 넘기지 못한다라는 말로 '고희'라는 단어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말대로 70을 넘기지 못하고 59세에 죽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우에 불과하다. 그들은 퇴장하고 또한 등장한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 동안 여러 편의 연극을 연기한다"고 했고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C(Choice)가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 의료사고로 죽은 가수 신해철은 "우리가 살고 잇는 인생은 신이 주신 보너스 게임입니다. 모두들 그저 아프지말고 건강만 하세요"라고 했는데 정작 본인은...

제가 처음 세부섬에 도착했을 때 나이는 32살이었습니다. 그때 세부섬에 정착을 하면서 제일 어색했던 부분이 이곳에서는 무덤가가 바로 시내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SM옆에 있고 또 가이사노 컨추리몰 건너편에 있고 라방온 쪽에 있고 또 만다위에도 있고 시내 대부분이 무덤가로 둘러싸여 있는 풍경이 너무나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특별히 고로도 아베뉴 쪽에는 무덤 묘비제작소가 길가에 있는데 현지말로는 Lapida(묘비제작)라고 합니다. 이곳을 지나 갈 때마다 늘 고개를 돌렸고 저하고는 상관이 없는 특별한 다른 장소로만 여겨왔던 곳이고 또한 난 스스로 아직 젊다고 생각을 하였기에 언제나 외면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23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나니 요즈음은 무덤가나 묘비명 제작소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불편한 곳이 아닌 아주 자연스럽고 나의 일상 중에 한 부분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청춘은 흘러 간지가 오래되었고 이제는 50대 중반으로가다 보니 무덤가는 제 종착역이고 안식처고 고향과 같이 조금씩 친숙해집니다. 시내에 위치한 무덤가가 무척 자연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관심은 나의 묘비명에 있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 인생을 요약해줄 문장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 사람은 이곳 세부 섬에 사랑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아니면 우리의 다정했던 친구가 이곳에 쉬게 되다... 나는 과연 세부섬에 무엇을 남기고 갈수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늘 하곤 합니다.

지난 5월 28일 구의역에서 운명을 달리한 19살 청년이 바라던 정규직의 꿈처럼 저도 세부섬에 도착해 희망의 꿈을 꾸며 가장 낙후된 곳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선교의 사역을 했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너무도 더워 하루에도 몇차례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 하면서도 그것이 청춘의 당연한 권리로 알았던 시절. 또 처음 원주민집을 방문할 때 제일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찾아나섰는데, 대부분 대나무 바닥으로 마감된 원주민의 집 다박에는 못들이많이 돌출되어 있어, 그 못들에 걸려 모처럼 차려입은 새 바지가 구멍이 나거나 찢어지던 일들. 그럼에도 언제나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원주민 언어인 세부아노 단어를 외우는 일상들.

그러한 땀과 열정과 도전이 나의 청춘에 있었기에 23년이 지난 지금 이 세부섬이 고향이 되어 두보처럼 세부에 취해있는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이곳 세부섬에서 오늘 땀 흘리는 당신의 청춘이 열정과 희망을 향한 도전의 시간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필자는 23년 전 세부에 정착하여 현재 한사랑 교회 목사, 코헨대학교 세부분교 학장에 재임중이며 UC대학 HRM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