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어느 헬퍼 이야기 2

필리핀, 어느 헬퍼 이야기 2

필리핀은 가톨릭 국가라서 이혼도 안되고 결혼하기 전에는 바랑가이에 한달 간 본인 이름과 배우자 될 사람의 이름을 올려 결혼할거니 이의있는 사람은 제기하시오 하고 공고를 내야 합니다. 워낙 혼전 동거나 호적에 안올린 결혼, 사생아 등의 문제가 많아서 입니다.

헬퍼 중에서는 애가 6~7명인데 아이들의 아빠가 다 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부양자, 아니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고 다닙니다.

지난 호에 언급했던 헬퍼... 치과 치료후 자신의 미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막나가던 그녀가 결국엔 유부남과 사귀더니 사고를 쳤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연애에 빠지면 물불 안 가리듯, 그녀도 몸주고 돈주고 마음주고... 심지어 '밥은 안 먹어도 휴대폰은 산다'라는 신조 하에 모든 국민의 '휴대폰 소장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자신의 한 달간 월급에 해당되는 휴대폰까지 빌려주고 못 받은 사태에 이른 것입니다.

임신한 후 사태의 심각성에 정신 차리고 안 만나주는 그녀에 앙심을 품은이 정신 빠진 유부남이 그녀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로 문자질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가족과 사촌, 그리고 저와 우리집 기사에게까지...

내용은 뭐 대충 다 알고 있는 사실... 자신의 죄나 파렴치한 짓은 생각 못하고 욕망을 풀어줄, 사랑 놀음의 장난감을 빼앗긴 수준 낮은 어린아이 같은 유치하고 분노에 찬 악랄하고 절없는 행동...

즉 '너가 알고 있는 그녀가 이런 여자다' 류의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지독히도 이기주의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지요.

결국엔 그녀를 집에 돌려보냈습니다. 그 유부남이 우리집 기사에게까지 문자를 보내 열 받은 기사가 경찰에 협박죄로 신고하려 하는 걸 말렸습니다.

이 나라는 가족주의가 강해서 원한을 샀을 경우 그 당사자가 잠적해 버리면 가족이나 친척, 친구에게 해코지를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 필리핀은 총기구입이 자유롭고 총기소유가 자유한 나라입니다.

몇 만원이면 권총을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단돈 몇 만 원에 청부살인도 가능한 나라입니다. 여기서 소지하고 있는 총기들은 정식 출고제품이 아니라 수제로 조악하게 만든 사제 총기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싸구려 총기의 정확도는 무척 떨어진다고 하지만 상황판단이 안되고 감정적이고 정신연령이 낮은 아이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상황에 견주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잘못하다간 애인을 잃어버린 유부남의 분노가 우리 기사나 우리 가족에게로 불똥이 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근원인 그녀만 보내버리면 그 감정이 식어버릴 것 같아 빨리 돌려보낸 것입니다.

좋은 취지로 해 넣어준 치아 3개가 이런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편과 둘이어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 해주는게 아니었는데..."하고 후회 했었습니다.

정말로 아무리 인간적으로 좋은 취지라 하더라도 선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 집을 떠나갈 때 그녀는 주변 모든 이들을 원망하며 떠나갔습니다. 유부남과 사귄 자신을 안 말렸던 것(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콩깍지가 씌워 안들었음), 자신의 아픔에 같이 동참하지 않은 것, 자신을 편들어주지 않은 것, 자기를 그만두게 한 것, 주변의 모든 이들을 원망하며 떠나갔습니다.

임신했던 그녀는 아이를 출산하고 그 후에는 아이 분유 값을 벌러 다시 세부로 왔었습니다.

저에게는 연락을 못하고 제 친구들, 즉 한국인들에게 연락하여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나마 필리핀인 집보다는 한국인 집이 월급이 많고 또 한국인 집에서 오래 있다보니 한국인 들의 습성과 행동을 잘 파악하고 있기에 그쪽으로 일자지를 찾고 있더군요.

세부가 좁다보니 한 다리 건너 그 아이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둘째딸 친구 엄마에게 전화가 왔엇습니다. 그녀에 대해서 묻더군요. 자기의 집에서 쓸까 하구요... 있는 그대로 말해 줬습니다. 일은 무척 잘하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다. 물론 질색을 합니다.

여느 필리핀 헬퍼들과 같은 인생을 걸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혼모에 아이 분유 값을 벌러 왔다면 다시금 남편을 찾아, 남자를 찾아 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 사랑을 찾아 불나방처럼 행동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생활의 초기에는 우리 집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경함한 인생의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주고 싶었습니다.

"너는 헬퍼의 인생을 걷지 말아아~", "비전을 가져라~", "미래를 생각해라~", "너를 위해서도 공부해라~" 라는 잔소리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가진 것이 없고 그렇기에 인생에 기회도 없었던 그 여자, 그 남자들의 삶을 바꾸기엔 미약했나 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없는 자들의 삶이 대물림되는 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듯 보입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처럼... 그렇게 가난과 무지가 대물림되는 이 땅의 없는 자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