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피피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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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편집자로 10년, 작가로 5년 일한 덕분에 커피에 대해서라면, 애호가 수준은 된다. 물론 애호가에도 급이 있어 5등급으로 나누자면, 전문성을 띤 고수에 가깝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한 달에 책값으로 지출하는 돈이 50만원일 때에, 찻값으로 지출하는 돈도 그만큼이 되었으니, 애용하던 커피숍 몇 곳은 직원이 바꿀 때, 나에 대한 교육을 따로 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세부 체류 2년, 이곳에서는 딱히 마음 두고 갈만한 커피숍이 없더니, 최근 두어곳 마음에 드는 커피숍이 생겼다. 한 곳은 막탄에 있는 시빗이요, 한 곳은 파크몰 뒤에 PP다. 집이 세부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시빗 커피숍에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이 두 곳의 커피숍이 생기기 전에 내가 주로 애용하던 곳은 스타벅스였다. 물론 커피맛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소의 편리성이 컸다. 사람을 만나거나, 아이들과 쇼핑하다, 글을 쓰거나 할 때 이만한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이곳 세부는 ‘다방’ 문화가 약하다.
한때 지인분의 추천으로 썬데이2pm과 마루라는 북카페도 이용해 보았다. 두 곳 모두 책이 있어서 좋고 내가 원하는 다방 컨셉에 가까웠으나, 안타깝게도 두 곳 다 방문할 때마다 한국분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스타벅스와 보스 커피를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이용했던 두 곳의 커피숍 되겠다.
자, 그렇다면 시빗과 피피가 어떻게 다른가 설명해 보자. 두 곳은 모두 커피전문점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특히 피피에는 로스팅 기계가 있어, 가게 문을 여는 순간, 짙은 커피향이 밀려온다. 그 황홀한 기분이란. 한국에서 다녔던 홍대와 합정역 인근의 나의 단골 커피숍 냄새 그대로였다. 시빗도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니, 그 정취가 그대로 살아있다.

하지만 이 두 곳 커피숍에 내가 빠지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주인장들이다. 시빗을 방문한 첫날, 나는 처음으로 필리핀 커피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취급하고 있는 바라코와 정글에 대한 시빗 주인장의 설명을 듣고 주문한 바라코와 정글을 번갈아 맛볼 때, 나는 ‘아, 이 집 제대로구나!’했다.
피피커피는 이보다 한 수 위인 느낌. 시빗 커피숍 주인장의 마스터라는 소문과 어떤 인연으로 방문한 피피커피숍. 피피커피숍에는 두 명의 장인이 있었다.
‘한 알의 커피콩이 한 잔의 커피가 되어 내 앞에 놓이기까지를 다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필리핀에 오게 됐어요. 직접 커피를 키워보려고요. 그런 세월이 10년이 넘었네요.’
피피커피숍의 윤야미니 선생의 말이다.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한국의 커피문화의 태동기라 해도 좋을 그때, 한국에서 커피숍 하나를 더 내기 위해 애쓰지 않고 이곳 필리핀, 그것도 번화한 세부가 아닌 보홀섬 딸리본으로 들어갔다. 딸리본의 환경이 천정하고 커피를 키우기에 적합한 편에 속해서라고 했다. 그녀는 10년 동안 커피콩을 심어 300그루의 커피나무를 울창하게 키워냈다. 그리고 딸리본의 험악한 산을 오르내리며 야생 커피를 채취하고 사향고양이의 ‘변’을 발굴하는 작업을 쉬지 않고 거듭하였다. 그렇게 커피에 미처 살다가 작년부터 세부로 나와 본격적으로 로스터리샵을 열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는 7월 파크몰 뒤쪽 상가에 ‘피피커피’ 1호점을 개점하게 된 건. 신문 지면을 소개된 커피숍의 모습 그대로, 한국에서 보았던 다방 분위기 그대로였다. 조금 어둡고 더 지저분했더라면 하는 개인적 소망이 있지만, 나의 개인적 취향이 대중성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깔끔하고 정돈된 인테리어를 탓할 수는 없다. 다만, 보통의 커피숍처럼 세련되기만 하고 차가운 느낌이 아니라 인간의 냄새가 난다는 점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커피는 지극히 인간적인 게 아닌가.
윤야미니 선생의 말씀처럼 커피는 농산물이다. 땅이 키우고 일궈낸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땅의 냄새, 햇살의 뜨거움, 새의 소리, 바람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그대로 담기는 것이다.

그래서 피피커피의 커피에서는 보홀의 새소리가 있다. 또한 그 커피콩을 수확하던 10년 동안 커피나무를 키운 피리피나의 열정이 있다. 천혜의 섬으로 불리는 보홀에서도 오지라 할 수 있는 딸리본의 맑은 공기와 맑은 물도 느낄 수 있다.
지난 금요일, 나는 이 피피커피에서 바라코와 아라비카 핸드드립 커피를 두어잔 마시며, 한국으로 밀린 원고들을 마무리해 넘길 수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와 바리스타들의 세심한 서비스, 그리고 그대로 매력적인 커피향이, 내 창작의 힘이 되었다면?
반갑다, 피피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