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즐겨 찾는 필리핀, 안심하는 순간 사고가 발생하는 곳”
에메랄드빛 바다, 보석 같은 백사장, 저렴한 물가…. 필리핀은 숨 막히는 일상을 사는 한국인에게 천국과도 같은 여행지다. 그 때문에 필리핀에 입국하는 여행객 가운데 한국인 수가 매년 압도적 1위를 차지한다. 2017년 한 해에만 160만 명, 하루 평균 4400여 명이 방문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착한 것도 잠시, 한눈팔기라도 하면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객이 많은 만큼 범죄에 연루되는 일도 많기 때문. 홀로 여행하는 대학생, 출장길에 오른 직장인, 자녀를 만나러 간 노부부 등 범죄 대상도 다양하다. 돈만 빼앗기면 다행이지만 개중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도 한다.
2013년부터 4년간 필리핀 영사를 지낸 박용증 서울 강남경찰서 112상황실장(경정)은 현지에서 한인 상대 범죄 현장을 뛰어다녔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각각의 사연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최근 ‘필리핀 경찰영사 사건수첩’이라는 책을 냈다.
필리핀 영사는 어떻게 가게 됐나.
“필리핀에는 마닐라 대사관에 경찰 영사 3명/ 세부 1명 그리고 코리안데스크 마닐라 2명/ 세부 1명/ 바기오 1명 / 앙할레스 1/명 까비테 1명 총 10명이 파견돼 있다. 미국 5명, 일본 5명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전 세계 한인 살인사건 가운데 30%가 필리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4년간 영사 생활은 어땠나.
“범죄가 끊이지 않는 곳이라 아내와 자녀들까지 위험에 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컸다. 막상 가보니 생활하기에 굉장히 좋았고, 6개월가량 지나자 긴장이 풀려 만만해졌다. 그런데 10년 이상 거주하는 교민들에 의하면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실제로도 필리핀 거주 6개월에서 3년 사이 교민이 피해를 입는 편이다.”
4년간 목숨 잃은 한국인 42명,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 사람도 많은데 한국인이 왜 유독 표적이 되나.
“필리핀에 있는 외국인 가운데 한국인이 가장 많다. 교민이 9만 명 정도로, 중국인보다 많은 숫자다. 외국인은 돈이 많다고 생각해 국적을 가리지 않고 표적이 된다. 하루 평균 29명이 살해된다. 1시간에 1명이 넘는데, 하루 1명꼴인 우리나라보다 많은 편이다.”
대부분 어떤 이유로 희생되나.
“살해된 42명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절반이 강도살인, 절반이 청부살인이었다. 필리핀에서는 총기 소지가 합법이라 160만 정 정도가 퍼져 있다. 불법 소지 총기까지 합해 200만 정가량이 있을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42명 중 10명이 총기에 의해 살해됐다. 또 청부살인은 표면적으로 한인들끼리 분쟁이 발생해 희생된 경우는 없지만, 배후에 한국인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피의자가 도주해 미해결로 끝난다.”
접한 사건 가운데 가장 안타까웠던 사례는.
“2015년에 발생한 70대 홍씨 피랍사건이다. 홍씨 부부가 필리핀으로 이민 간 아들을 처음 방문해 아들 친구 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집 안으로 경찰복을 입은 현지인들이 들이닥쳐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는데, 복장과 행동이 허술해 아들이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는 사이 실신한 홍씨만 납치됐다. 알고 보니 아부 사야프라는 테러단체의 소행이었다. 아들은 민다나오섬에서 귀금속 제련업을 했는데, 돈이 많다고 소문난 것이 화근이었다. 홍씨는 테러단의 근거지인 홀로섬으로 끌려가 10개월간 구금돼 있었는데 외교부가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끝까지 버티다 송환되기 이틀 전 운명을 달리해 시신만 돌아왔다. 유가족도 상당히 힘들어했지만 나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협상에 참여했던 터라 트라우마가 컸다.”
테러단체에 의한 범죄가 자주 발생하나.
“필리핀에는 여러 반군단체가 있다. 이슬람 독립을 추구하는 단체들로, 인질협상을 벌이는 테러단체도 있다. 홍씨 납치의 경우 일반 가정집을 습격한 사례고, 그 1년 뒤 우리나라 화물선을 아부 사야프가 납치하기도 했다. 어선으로 위장했다 올라탄 뒤 한국인 선장과 필리핀 선원을 납치해갔다. 일명 동방자이언트호 사건인데 선사 대표, 외교부와 함께 협상을 추진했고 다행히 3개월 만에 모두 석방됐다.”
살인사건 이외에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나.
“마취강도 사건도 상당히 많았다. 아티반이라는 마취약으로 강도를 벌이는 갱단이 있었다. 출장 간 한 직장인이 경험한 사례로,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햄버거 가게에서 혼자 식사하는데 맞은편에 앉은 아이가 웃으며 초콜릿을 줬다. 별 의심 없이 먹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고, 아이의 엄마와 할머니가 부축해 저항도 못한 채 택시에 탔다. 깨어 보니 허름한 주택의 매트리스 위였다. 36시간 동안이나 잠을 잤다는 것을 알았고, 그사이 계좌에서 현금이 대거 인출돼 있었다. 마취 상태에서 비밀번호를 알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2016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집권 이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나.
“조금 나아졌다. 올해는 한인 살인사건이 3건으로 과거에 비해 줄었다. 두테르테 정권 이후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마약 범죄를 이유로 사살해버리기 때문에 필리핀인 사이에서도 공포감이 조성돼 있다. 그만큼 절대적인 범죄 발생 건수는 감소했다. 하지만 필리핀 경찰 수사력이 강화되거나 치안 상황이 개선된 것은 아니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한국인들이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준다면.
“한국인이 많이 가는 주요 관광지는 안전한 편이다. 그런데 특이하고 생소한 곳에 갈 때는 철저히 조심해야 한다. 필리핀은 대로변을 조금만 벗어나도 뒷골목에서 현지인이 총을 들고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에 호기심에 따라 움직여선 안 된다. 또 택시를 탈 때도 공항에서는 가급적 공항택시만, 호텔에서는 직원이 불러주는 택시만 탈 것을 권한다. 그리고 앞좌석이 뒷좌석보다 덜 위험하다. 하지만 뒷좌석도 운전석에서 잠금장치가 가능하므로 한순간도 주의를 놓아서는 안된다.
또 사고가 발생하면 외교부 영사콜센터로 전화하고, 현지 필리핀 경찰 전화 117에도 신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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