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기③ : 팍상한 폭포(Pasangjan Fall

팍상한 폭포.jpg

하늘이 뚫린 강을 보트 맨과 함께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의 영화 촬영지로 이미 잘 알려진 팍상한 폭포를 찾은 건 필리핀에 정착한 생활, 2년차 어느 휴일이었다. 마닐라 파사이 시티 타프 에비뉴 브웬디아에서 출발하는 '그린스타' 버스노선이 있었다. 여행은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늘 신선한 감동과 재미, 그리고 흥미를 유발하게 한다. 기질적으로 타고난 '방랑 끼'라고나 할까? 출발하기 전 차안에서 파는 뽕간(귤)과 땅콩을 먹으면서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는 나의 눈빛은 사뭇 기이한 무엇이나 발견한 듯이 번득이는 느낌을 몇 번이나 거듭했다. 버스는 남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가다가 '라구나 주 깔림바' 인터체인지를 들어서면서 다시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닐라에서 약 105킬로 남동쪽에 위치한 팍상한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시간이었다. 버스가 내리는 종착 지점은 팍상한에서 약10킬로미터 남은 '싼타크루즈'란 작은 문니시팔(읍,면 규모 작은 도시)이었다.

이곳에 내리니 여행지에서 늘 만나는 사람, 좋은 말로 표현하면 안내인, 나쁜 말로 하자면 '호객꾼'들이 나를 둘러쌓다. 서투른 한국말로 '싸요', '좋아요'라고 연발하며 나를 끌어 싱글 오토바이에 실었다. 이들이 안내하여 도착한 작은 리조트에서 간단히 현지인 음식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보트맨이 일일이 하라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헬멧을 쓴 다음 보트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이미 여러 한국 관광객들이 보트를 타고 출발하였거나 나같이 출발을 준비하는 팀이 많아 보였다. 필리핀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이곳 팍상한 폭포가 인기 1위 관광지라고 알려진 만큼 휴일에 더불어 팍상한 폭포로 향하는 작은 카누형태의 몇몇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출발했다. 비상하는 기대감으로 탄 보트가 조금씩 상류로 올라가다보니 내 눈에 비치는 장관이 장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신음이 터져 나오는 '감탄' 그 자체였다. 강폭이 그리 넓지 않은 좌, 우측으로 치솟아오른 계곡 사이사이에 작은 폭포가 쏟아져 내렸고 바위틈 사이사이에서 작은 원숭이들이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Untitled-2.jpg

하늘이 뚫린 시공 한 가운데 포개진 동양화와도 견줄 수 없는 그림이 내 시각을 감싸 안았다. 상류로 거듭 올라가니 보트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얕은 수심이 드러난 바위가 보이자 2인조 보트맨은 잽싸게 내가 탄 보트를 손수 끌고 올라갔다. 검게 그을린 앙상한 얼굴과  근육질 등허리에 힘줄이 솟아났다. 보트가 중간 쯤 올라갔을 때 치킨을 파는 열 살쯤 안 되는 소녀를 만나자 보트맨이 치킨을 사달라고 조른다. '에이 그래 인심한번 쓰자'라고 마음먹고 치킨을 사주니 싱글벙글 얼굴색이 확 달라진다. 나를 태운 보트는 팍상한 폭포가 있는 종점에 다다르자 보트맨은 친절하게 다시 뗏목으로 엮은 곳으로 옮겨 폭포 세례를 맞으라고 권한다. 나는 여러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끼여 폭포가 내리치는 맨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주먹만한 우박같은 폭포수가 내 얇은 헬멧을 장구치고 북치듯 두들겨댔다. 입고 있는 옷은 비에 맞은 생쥐처럼 젖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차가운 한기를 만끽한 클라이막스가 최고의 팍상한이기도 했다.

나를 태운 보트가 여유롭게 내려오면서 보트맨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여러 나라 관광객들 중 유독 한국 관광객들은 항상 '빨리 빨리'를 재촉한다는 것. 그런데 '당신은 왜 재촉하지 않고 점잖을 빼냐?'라고 반문한다. 난 이 이야기에 갑자기 깊은 상념에 빠졌다. 한국 사람들이 이곳 관광지에 와서도 그렇게 바쁘게 여유 없이 '빨리빨리'만 외치는 사람으로 인식 되었을까? 사실 한국이란 우리나라는 불과 짧은 기간 중에 눈부신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뤄낸 나라이지만 국민들이 살아가는 행복지수가 상당히 낮은 나라에 속하는 나라임을 이곳 필리핀을 살면서 더욱 실감하게 된 서글픈 자화상이다. 뭔가 바쁘게 쫒기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뭔가 여유 없이 오직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국민성인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이런 여행지에 와서도 삶속에 묻어나는 기질을 유감없이 그들 보트맨에게도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든게 사실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좀 기다리는 여유', '좀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소회는 팍상한 보트맨들이 나에게 일개원 준 잠시잠깐 시간들이었다.

글 : 등필(이윤주)
1989년 '현대시학' 등단시인 자유여행가 현 A.O.G 필리핀 비사야지역담당으로 활동하고 있다.